[기자칼럼]영화 '소수의견'이 묻는 것

정제혁 2015. 8. 2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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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영화 <소수의견>을 집에서 IPTV로 내려봤다. 개봉관에서 시간대가 맞지 않아 보지 못했던 영화다. 쉬는 날 집 근처 코엑스 메가박스에 가보니 하루에 두 차례만 상영하고 있었다. 다음 상영시간까지 기다릴 일이 막막해 발길을 돌렸다. <연평해전>이 극장가를 점령하던 때였다.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는 종종 내용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감정의 열도를 조절하지 못해 재미없고 촌스러워지곤 하는데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영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은 웰메이드 법정영화였다. 윤계상의 깊은 눈매, 유해진의 사려깊은 넉살, 김옥빈의 치기어린 터프함, 이경영의 흔들리는 눈빛, 김의성의 음산한 기운, 권해효의 권태로운 표정이 캐릭터에 잘 녹아들었다. 법정 공판 장면과 판검사들의 언행을 실감나게 묘사해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철거용역과 한패가 된 경찰과 철거민이 충돌한 현장에서 의경 한 명과 철거민 박재호(이경영)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의경을 죽인 사람은 박재호다. 박재호는 어쩌다 의경을 죽이게 됐는가, 박재호의 아들은 누가 죽였는가 쫓는 것이 영화의 뼈대다. 그 위에 진실을 밝히려는 쪽과 덮으려는 쪽의 대결과 수싸움이 펼쳐진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가깝다. 누구도 살인을 의도하지 않았고,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동기를 갖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누군가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 자체이다. 자본과 한패가 된 공권력, 철거민을 양산하는 토건주의적 국가시스템이 그것일 테다. 박재호가 의경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할 때, 또 죽은 의경의 아버지(장항)가 “그의 눈앞에서 아들이 죽었으니까요”라며 박재호의 주장을 옹호하면서도 “우리 아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절규할 때, 그들은 실은 국가야말로 유죄임을 논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는 국가라는 시스템을 단죄하는 데 한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박재호와 죽은 의경의 아버지의 눈빛은 종종 갈피를 잃는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 같다. 사건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검사직을 떠난 홍재덕(김의성)은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변호사 윤진원(윤계상)에게 영화 말미에 비릿하게 말한다. “국가라는 건 말이다,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누군가는 봉사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유지되는 거야. 말하자면 박재호는 희생을 한 거고 나는 봉사를 한 거지. 근데 너는… 결국 너는 뭘 한 거냐? 니가 하는 게 뭐야 인마.” 국가는 그 자체로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홍재덕의 말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도록 하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영화는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듯하지만 내용은 허구이다. 그러나 의도했건 안 했건 ‘국가의 폭력’이라는 용산참사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국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영화적 응수로도 읽힌다. <국제시장> <연평해전> <암살> 등 애국주의적 정조의 영화가 대세를 점한 올해 한국 영화시장에서 <소수의견>은 38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좋은 국가’이고, 좋은 국가는 지금의 문제점을 부단히 환기하고, 공론화하고, 개선해야 만들 수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행위는 좀 더 어엿한 국가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국가를 절대화하고 아무런 문제제기도, 비판도 하지 않는 것은 개선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수의견>의 흥행부진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이른바 애국주의 흐름의 기우뚱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정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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