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변호인'처럼 돼서는 안 된다

이희동 입력 2015. 8. 28. 15:28 수정 2015. 8. 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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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해서 <암살> 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이희동 기자]

▲ 영화<암살>의 포스터 드디어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
ⓒ 케이퍼필름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기자 그 최종 기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언론들은 언제나 그랬듯 역대 한국영화 순위를 열거하며 <암살>이 써낸 새로운 기록들을 들추어내기 바쁘며, 호사가들은 최동훈 감독이 영화 <도둑들>과 <암살>로 <해운대>와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에 이어 천만 관객 작품 2개를 보유하게 됐다며 그 의미를 이야기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주연 배우가 인기 있고 배급사가 상영관을 많이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만 관객의 필요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화려한 캐스팅과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망했던 영화들을 끊임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결국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영화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바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암살>에 대한 숫자놀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영화를 뜻 깊게 봤던 관객으로서 <암살>에 대한 이슈가 천만 관객에 몰리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암살>은 한국영화계의 기록만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조금 더 깊이 음미해야 될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야기 했다고? 아니,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암살>은 조금 더 많은 이들과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직 우리는 <암살>이 그린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

▲ 영화 배경이 된 1930년대 상하이 동아시아의 1930년대는 다시금 볼 필요성이 있다
ⓒ 케이퍼필름
<암살>이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무엇보다 영화의 배경 때문이었다. 영화는 1930년대 동아시아, 우리에게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 시기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틀어 시대배경으로 선택된 적이 별로 없다. 등장하더라도 기나긴 역사 속의 일부일 뿐이었다.  

사실 1930년대는 창작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국권을 일제에게 침탈당해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대로 평가되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생활방식이 아주 급격하게 변화된 시대였던 바, 그만큼 수많은 이야기 소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접하면서 기존의 생활방식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만 했고, 일제에 의해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지만 한편으론 근대 국가에 대한 개념이 더욱더 분명해져 갔다.

그 묘한 분위기는 영화 초반의 배경이 되었던 상하이 신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 상하이는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곳은 당시 서구 열강의 조차지들이 위치해 있었던 만큼 매우 이국적이다. 당시 상하이는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며, 전근대와 근대가 섞여있는, 현대 국가의 국민들의 감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시공간이다. 지도에도 없던 조선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버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공간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경성도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경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드라마틱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이 합병된 지 20년이 지난 그 시점에도 경성에는 생각이 매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서로 얽히고 설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을 테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끝까지 항거해야 했던 일제 식민지의 거점이었던 1930년대 경성.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이 매력적인 1930년대를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일까? 예술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킬 소재가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이 시대는 언제나 대충 건너뛰고 마는 것일까? 단지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추기 싫어서일까?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잡고 있는 세력들이 1930년대를 기억하기 꺼려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척결하지 못했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우리 사회를 망각의 늪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가 1910년 이후부터 흐지부지 되다가 해방 이후부터는 아예 다루지 않는 건 국민들이 그 시대를 알면 알수록 불편한 이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암살>은 영화 외적으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암살>은 천만 관객 이상을 들인 영화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일제강점기를 다시금 우리 앞에 가져다 놓은 영화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모순이 그 시대와 맞닿아 있음을,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시대에 대해 좀 더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암살>은 최동훈 감독의 기존 영화와 달리 인물과 배경 설명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감독이 관객들에게 그 시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영화 속 안옥윤의 대사는 결국 감독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관객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 조승우가 분한 약산 김원봉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언급해야 된다
ⓒ 케이퍼필름
감독은 영화 <암살>을 통해 1930년대를 호명하면서 중요한 인물 한 명을 우리들에게 소개한다. 비록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어쩌면 감독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한 그 사람, 바로 김원봉이다.

사실 나 역시 약산 김원봉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학창 시절 때 조선의열단 김원봉을 외운 기억은 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이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몰랐었다. 그는 내게 수많은 독립투사 중 한 명이었고, 그나마 국사 시험을 볼 때 밑줄 정도는 그어줘야 되는 위인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런 김원봉을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이이제이>를 통해서였다. 평소 한국의 근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풀어내는 <이이제이>에서 이동형 작가는 김원봉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독립투사로 소개했었다.

일제에겐 김구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지만, 친일파가 득실거리는 남한에서 살지 못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곳에서도 김일성을 뛰어넘는 화려한 독립운동 경력 때문에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숙청당해야 했던, 그래서 결국 남과 북의 역사 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린 비운의 존재 약산 김원봉.

그런데 <암살>이 그 김원봉을 스크린으로 불러내어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 앞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지금까지 빨갱이로 덧칠되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그가 화려하게 우리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항상 입고 다녔다는 양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배우 조승우가 나와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대사를 했을 때 느꼈던 그 쾌감이란.

관객들이 김원봉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은 다행히 현재 진행형인 듯하다. 이동형 작가는 다른 팟캐스트에 나와 영화 상영 이후 <이이제이-김원봉>편이 꽤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개봉 이후 10만 명이 넘게 다운로드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결국 <암살>이 사람들에게 김원봉을 환기시켰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의무

2014년 1월, 그때 난 매우 흥분해 있었다.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의 동료가 물었다.

"사람들이 <변호인> 많이 본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뭐가 달라지는데?"
"그래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어쨌든 <변호인>을 보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릴 테고, 그럼 그의 삶을 돌아보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어쨌든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변호인>은 천만 관객을 넘었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에 침묵했으며 우리는 그렇게 3개월 뒤 세월호 사태를 맞았다. 만약 <변호인>를 본 천만 명이라도 세월호 사태에 대해 무언가를 했으면 그 결과는 지금과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암살> 천만 관객을 목도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친일파, 반민특위, 독립운동 등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화석이 되어버린 것들을 다시 공론장으로 불러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태극기만 흔들면 애국이 되어버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고 있는 것이다.

자,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반민특위를 유유히 걸어 나온 염석진에게 거수경례를 할 것인지, 아님 오래된 복수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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