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폭발을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이었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2015. 8.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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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총격 범인이 남긴 자살 노트엔.. "평소 흑인·동성애자라 차별 받아"] -백인 혐오 발언도 쏟아내 "날 이렇게까지 만든 건 흑인 교회 총기난사 인종 전쟁 한번 해보자.. 조승희 사건도 영감 줘" -오바마, 총기규제 재차 촉구 "총격 때문에 숨진 자가 테러 사망자보다 많아"

인터뷰를 진행하던 방송기자와 카메라맨이 갑자기 총격 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생방송되면서 미국 사회가 다시 한 번 총기 규제 논란에 휩싸였다. 두 기자는 해고된 전직 동료 기자의 총격으로 26일 사망했다. 일종의 '증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달아나다 경찰의 추적을 받자 스스로에게 총을 쐈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다.

사건은 이날 오전 6시 45분 미국 버지니아주(州) 프랭클린 카운티의 브리지워터 플라자에서 일어났다. 지역 행사와 관련해 지역 상공회의소 비키 가드너 사무국장을 인터뷰하던 WDBJ방송사 앨리슨 파커(24) 기자와 카메라맨 애덤 워드(27)를 이 방송사 전직 기자였던 베스터 리 플래내건(41)이 조준 사격했다. 방송에서 브라이스 윌리엄스란 이름을 사용했던 범인이 권총으로 6~7발을 쏘면서 현장은 총성과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총격 당한 워드가 쓰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카메라가 총구를 겨냥한 범인의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파커와 워드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가드너 사무국장은 등에 총을 맞았으나 목숨은 건졌다.

숨진 두 사람은 방송사의 다른 동료와 사내 연애 중이었다. 특히 워드의 약혼자인 멜리사 오트는 아침 뉴스쇼 담당 PD로 총격 당시 방송 부조종실에서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이날 근무를 끝으로 퇴사 예정이었으며, 동료들은 작별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흑인인 플래내건은 방송사가 자신을 해고한 것과 관련해 인종 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방송사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쏜 두 사람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다. 총격 직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한 번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 갔다' '(이들이) 인종 차별 발언을 해 회사에 알렸는데도 그대로 고용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방송사 측은 범인이 입사한 지 11개월 만인 2013년 2월 다른 동료와 어울리지 못하는 '분열적 행동'으로 해고했다고 밝혔다.

플래내건은 사건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범행 후 2시간 뒤 ABC방송에 23쪽 분량의 '친구와 가족에게 보내는 자살 노트'를 팩스로 보냈다. 일종의 '범행 선언문'으로 찰스턴의 흑인 교회에 총기를 난사한 백인 청년 딜런 루프에 대한 분노,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한국계 대학생 조승희에게 영향받았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ABC방송은 플래내건이 몇 주 전 전화를 걸어 팩스 번호를 물었다고 밝혔다.

플래내건은 이 문건에서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것은 찰스턴 교회 총격 사건"이라며 딜런 루프에 욕설을 퍼부은 뒤 "인종 전쟁을 원한다고 했으니 한번 해보자"라며 백인에 대한 혐오감을 쏟아냈다. 그러나 실질적 동기는 자신이 흑인인 데다 동성애자여서 수시로 차별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을 '폭발을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human powder keg)'으로 묘사했다.

플래내건은 WDBJ에서 일하기 전에도 여러 지역 방송을 거쳤지만 동료들과의 불화 등으로 정착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들은 이웃 주민 등의 말을 인용해 평소 플래내건이 비정상적으로 자기 과시욕이 강했으며, 은둔형 외톨이 성향도 보였다고 전했다. 범행 직후 달아난 범인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살해 장면을 찍은 동영상을 직접 올린 것도 충격을 안겼다. 한 손에 총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총을 발사하는 장면이 담겼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총기 규제 입법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총기 관련 사망자가 테러로 숨진 사람 수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총기 폭력을 줄이는 가시적 효과를 가져올 상식적 조치들이 있는데, 이것은 의회만이 할 수 있다"며 정치권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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