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과 문학권력에 대하여

2015. 8. 2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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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장정일의 독서 일기

<말과 활>(2015년 8~9월)<실천문학>(2015년 가을호)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을 '창조'라고 사전은 말한다. 하지만 그런 창조는 한번도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래된 그리스 신화는 창조를 '혼돈(chaos)에서 질서'가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며, 유대-기독교 전통 역시 창조를 '혼돈으로부터의 분리'라고 말한다. 이때의 '혼돈'은 '무'일 수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잘 알려진 관용구는 결코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무는 그 어느 기원, 그 어느 장소에서도 실재한 적이 없다.

신경숙 사태 이후, 글쟁이들 가운데서 '나도 표절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예컨대 여성학 강사 정희진은 모 월간지에 기고했던 자신의 글 가운데 한 문장("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가 짐승의 발자국이라면, 몸은 첫 번째 인식 도구였다.")이, 소설가 정찬의 최근작에서 몰래 따온 것("인간이 본 최초의 언어가 무언지 아나?", "짐승의 발자국이었어.")이라면서, "소설가 정찬의 표현에 의하면"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작가에게 용서를 구했다. 정희진이 자신의 죄(?)를 자복했던 '표절 이후의 사회'라는 칼럼 제목이 내게는 '표절 이후의 광풍(狂風)'으로 읽힌다.

정희진은 글쓰기 혹은 창작을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으로 옹호하면서, 창작과 글쓰기 공간에서 혼돈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는 기세다. 하지만 정희진이 용서를 구하고자 했던 정찬의 문장이 정작 정찬만의 고유한 표현이 아니라면 어쩔 텐가? 새와 짐승 발자국이 그림 글자가 되고 한자가 되었다는 얘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보았던 것이다. 또 정찬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동물 다큐멘터리 영화나 도감에서 그와 유사한 인식을 빌려왔거나 변주했을 수도 있다. 설사 저것이 실제로 정찬의 것이어서 허락을 맡거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정도라면, 정희진이 쓴 원고지 11장 분량 글 가운데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말과 활> 8~9월호와 <실천문학> 가을호는 '신경숙 사태'로 불거진 표절과 문학 권력을 특집으로 삼았다. 이들은 표절과 '문학 권력'의 추한 민낯을 드러내는 데는 열성이었으나, 계몽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 주장은 신경숙이 표절하지 않았다거나, 그것을 감싸는 노회한 문학 권력이 없다는 게 아니다. 영향과 모방은 물론 페스티시·인용·인유·패러디가 혼재되어 있는 문학 자체에 대한 고뇌와 추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 논의를 빠뜨리면 누군가가 신경숙을 검찰에 고발했을 때처럼, 문학계는 '현택수는 문학을 모른다', '문학은 문학 하는 사람들만이 안다!'라는 동어 반복밖에는 더 할 말이 없어진다.

문학이나 글쓰기는 순수 기억의 공간이 절대 아니다.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문학과 글쓰기의 공간은 더더욱 다른 이의 기억이 중첩된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토록 다른 이의 기억에 오염되고 얼룩져 있는 것이 문학일 때, 경계해야 할 최대의 문학 사기꾼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한 문장, 한 단어, 모두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만 쓸 수 있다.' 이렇게 떠드는 사람이 문학 권력이다. 표절을 빌미로 이들이 성토한 목전의 문학 권력이 해체되었다손 치더라도, 도전받지 않은 '문학'은 금세 또 다른 문학 권력을 만든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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