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살아남는 경제는 왜 위험한가?

박종훈 2015. 8. 17.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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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34

얼마 전 재벌을 대변해 온 한 민간경제연구소 소장이 쓴 글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는 진화경제학의 적자생존(適者生存) 법칙에 따라 앞으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 세계에서 1등을 차지한 다국적 기업만이 살아남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재벌을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진화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다른 것은 몰라도 ‘재벌우선주의’ 주장에 진화경제학을 끌어들인 것은 명백한 오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별 기업이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가 1등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진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1등만 살아남아 그 나라의 자원을 독식하는 경제구조는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승자의 조건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별기업이 아무리 노력해서 1등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환경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이 때문에 1등만 살아남은 경제보다는 다양한 2등도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경제가 더욱 변화에 강한 힘을 갖게 된다.

■1등을 놓치지 않아도 위기는 찾아온다, 닌텐도의 교훈

세계 최대 게임기 생산업체였던 닌텐도의 몰락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닌텐도는 2009년 영업이익 5,300억 엔, 우리 돈으로 4조 7천억 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냈다. 특히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36.8%나 될 정도로 엄청난 수익률을 자랑했다. 영업이익률이 5%대에 불과한 한국 기업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직원 1인당 매출은 10억 엔, 우리 돈으로 90억 원에 육박해 도요타의 5배를 넘었다. 당시 닌텐도는 그야말로 ‘꿈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경제 환경이 급변하면서 1등 닌텐도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경이적인 성과를 낸 지 불과 2년 뒤인 2011년 한 해 동안 650억 엔, 우리 돈으로 6천억 원에 육박하는 순손실을 본 것이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게임기 회사 닌텐도가 위기를 겪었던 이유는 닌텐도가 1등을 하는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적이고 놀라운 경쟁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게임을 사기 위해 번거롭게 매장을 찾아가거나 인터넷 주문을 해야 하는 닌텐도와는 달리, 스마트폰은 몇 번의 터치만으로 원하는 게임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스마트폰용 게임은 대리점이 필요 없고 유통구조도 단순해 닌텐도용 게임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했다. 이처럼 편리하고 값싼 스마트폰 게임이 쏟아져 나오자, 소비자들은 순식간에 닌텐도 게임기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닌텐도는 다른 게임기 회사와의 경쟁에서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승리해 온 불굴의 게임기 업체였다. 하지만 새롭게 펼쳐진 스마트폰 환경 하에서는 그렇게 고생해서 얻는 1등의 지위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처럼 패러다임이 바뀌는 급격한 경제 환경의 변화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부동의 1등조차 한순간에 무너뜨리게 된다.

■한 기업에 매달린 경제는 얼마나 위기에 취약한가, 노키아의 교훈

제아무리 1등 기업이라도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는 상황에서 1등 기업 하나에만 국가 경제를 의존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노키아라는 기업 하나에 의존했던 핀란드 경제가 노키아 몰락 이후 큰 위기를 겪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노키아는 한 때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핀란드 수출의 20%를 담당할 정도였다.

이처럼 세계 1등이었던 노키아의 놀라운 성공 이면에는 핀란드에서 새로운 혁신 기업의 씨가 말라가는 어두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핀란드 정부는 자국 경제의 명운(命運)이 걸려 있다고 믿었던 노키아를 위해 온갖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노키아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혁신적인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지 못했고, 핀란드 특유의 기업가 정신은 오히려 쇠퇴해 갔다.

수학 및 과학 분야에서 항상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핀란드가 과감한 정보통신 연구개발 투자를 해왔음에도, 이를 활용해 새로운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할 혁신적인 창업 기업(Startup company)은 점점 사라져갔다. 핀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에르코 아우티오(Erkko Autio) 교수는 핀란드 경제가 우수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도 혁신적인 벤처기업을 키워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켜 ‘핀란드 패러독스(Finnish Paradox)’라고 불렀다.

마침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핀란드 패러독스는 핀란드 경제에 큰 위기를 불러왔다. 노키아는 여전히 피처폰(Feature phone; 非 스마트폰) 시장에서 최강자였지만, 새로운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키아가 흔들리자 노키아 외에 별다른 대표 기업을 키우지 못했던 핀란드는 곧 국가적 위기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2009년 핀란드 경제는 - 8.3%라는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경제진화론을 우생학(Eugenics)으로 왜곡하지 마라!

그런데도 경제진화론을 잘못 이해한 일부 ‘재벌우선주의 경제학자’들은 적자 생존을 내세우며 1등이 독식하는 경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1등만 살아남기 때문에 재벌에 남은 자원을 우선적으로 몰아줘야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경제진화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진화론에서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항상 우월한 절대적 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 현재 주어진 환경에 유리한 적자만 있을 뿐이다. 환경이 변하면 새로운 환경에 따라 적자가 되는 기준이 달라진다. 이 때문에 기존 경제환경에서 1등이었다고 해서 미래에도 1등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특히 지금처럼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서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구하는 특성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열등했던 특성이 우월한 특성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1등만 살아남는 경제는 위험하다. 생태계에서 종(種)의 다양성이 중요하듯, 한 국가 경제 내에서도 다양한 특성을 가진 경제 주체들이 공존하며 활동할수록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고 활력이 넘치는 경제가 된다. 1등이 독식하는 경제보다 다양한 2등, 3등이 살아남은 경제가 더 큰 잠재력과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가진다. 한국 경제가 지금처럼 몇몇 재벌에만 의존한다면 한국 경제의 변화 적응력과 지속가능성은 점점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다음 주에는 대담한 경제 마지막화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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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기자 ( jongho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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