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만 살아남은 경제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박종훈 2015. 8. 10.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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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33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 재벌의 또다른 문제를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 함께 드러났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서울 중구의 한진빌딩 1층에 있는 커피숍 점포를 운영해 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세계를 상대로 치열한 경쟁에 나서야 할 재벌 3세가 본사(프랜차이저, franchisor)도 아닌, 커피 가맹점(franchisee) 장사까지 하고 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재벌 후계자들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전력을 다하는 대신 손쉬운 돈벌이를 택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12년, 우리 정부는 난데없이 재벌과 ‘빵’ 전쟁을 벌여야 했다. 재벌 2세나 3세가 앞 다투어 제빵 사업에 뛰어드는 바람에 영세한 동네 빵집들이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한국경제에서 재벌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단순히 ‘제빵 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한국 재벌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우월한 힘을 이용해 기존의 재벌을 대체할 수 있는 더욱 혁신적이고 뛰어난 기업의 등장을 막아왔다’는 점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새로 창업한 기업이 뛰어난 기술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도 재벌이 뒤늦게 뛰어들어 시장을 빼앗거나 핵심 기술인력을 빼내가는 등 온갖 방법으로 신규 창업 기업의 성장을 방해해 온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구글(Google)이나 페이스북(Facebook)처럼 창의성 하나를 무기로 새로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좀처럼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파이낸셜 타임즈는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 같은 재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일부 재벌이 제빵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하더라도 재벌의 골목상권 진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하였다.

■ 왜 유독 한국의 재벌 2,3세들은 손쉬운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을까?

선진국의 대기업들도 우리 재벌들처럼 막강한 자본력과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의 대기업이 골목 상권에 앞 다퉈 진출하거나 신규 창업기업의 시장이나 기술을 빼앗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도대체 왜 우리 재벌 2세나 3세들은 그 막강한 자본력으로 영세한 골목상권까지 탐내며 중소기업의 시장을 노리는 손쉬운 사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1970년대 우리나라는 정말 기업하기에 녹녹한 환경이 아니었다. 국가 경쟁력은 형편없었고, 기술력도 낮았다. 하지만 도전정신을 갖고 있던 우리 기업들은 온갖 악조건을 딛고 세계 시장에 도전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기업하기 편안한 환경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환경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재벌들이 국가 경제정책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자, 과거와 달리 기업하기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달라며 온갖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 재벌의 요구는 규제개혁 같은 용어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시장의 공정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규제 개혁은 기존 재벌에게만 유리할 뿐, 야심찬 도전에 나서는 새로운 창업 기업에는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

우리 경제의 남은 여력을 재벌에 몰아주는 정책은 조세 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천문학적인 이익을 보는 삼성전자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웬만한 중소기업의 법인세율보다도 낮다. 이익이 늘어날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율을 적용하기는커녕 온갖 공제제도 때문에 오히려 세율이 낮아지는 역진적 법인세 구조 덕분에 재벌들이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08년 이후의 과도한 고환율 정책은 대기업 위주 경제 정책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 결과, 기업의 이윤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지만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은 정체되는 현상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 대한민국 재벌의 도전정신을 앗아간 것은 바로 안락한 환경이다

바이킹이 유럽의 바다를 호령했던 이유는 그들의 땅이 너무나 척박하여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풍요롭고 안정적인 환경 덕분에 강해진 것이 아니다. 재벌이 별다른 도전을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어주면, 재벌이 바보가 아닌 이상 혁신적이고 위험한 도전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다.

그 동안 정부가 기업하기 ‘편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온갖 특혜를 제공해 온 덕분에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안락한 온실이 생겼는데, 어떤 기업이 스스로 온실 밖으로 뛰쳐나가 악조건 속에서 싸우는 어려운 길을 택하겠는가? 결국 온갖 풍파를 이겨내며 강인하게 성장해 온 대한민국의 재벌이 온실 속의 화초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규제 완화를 핑계로 혁신적인 중소기업을 위협하는 재벌의 불공정 거래를 눈감아 준다면, 재벌은 더 창의적인 도전에 나서는 것보다 미래의 경쟁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중소기업의 싹을 제거하는 것이 더욱 이윤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된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는 각종 제한을 완화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되는 어려운 길을 가는 것보다 동네 상권을 위협하고 중소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 더 손쉽게 이윤을 늘릴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재벌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원을 거의 독식하고 있는데다가 사업 실패에 따른 리스크도 훨씬 낮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대한 부담도 적다. 그러한 재벌이 우리 경제 전체의 파이를 늘리는 새로운 도전을 기피하고 기존의 파이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미 한국의 모든 자원을 독식한 강력한 재벌들에게 정부가 과도한 재벌 보호 장벽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재벌을 더욱 나약하게 만들고 한국 경제 전체의 성장과 활력까지 떨어뜨리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될 강력한 재벌을 갖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치열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널리 열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노력만으로 역전을 꿈꿀 수 없는 경제구조에서는 단지 뒤쳐진 사람만 절망하고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재벌의 후계자들도 점점 더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 창업한 기업이 뛰어난 아이디어만 있다면 언제든 구글처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기존의 재벌 후계자들도 그에 뒤처지지 않도록 더 놀라운 혁신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애덤 스미스는 ‘공정한 경쟁’을 강조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18세기 당시 영국의 정경 유착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당시 대상공인(지금의 재벌)에게만 특혜를 줬던 영국의 중상주의 경제정책으로는 소수의 부자와 권력자만 혜택을 볼 뿐 영국 경제 전체로는 손해이기 때문에, 대상공인의 특권을 철폐하고 새로운 중소상공인들이 이들과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시장의 힘’은 소수의 대상공인이 시장의 질서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애덤 스미스의 혜안은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의 역할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 하지만 내 자식이 귀하다고 아무 어려움없이 온실 속 화초처럼 오냐오냐 해서 키우면 그 아이의 미래를 망칠 수 있는 것처럼, ‘재벌하기’에 너무나 편한 환경은 재벌 후계자들이 글로벌 경제 전쟁에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도전정신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빵집 같은 골목상권에나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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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기자 ( jonghoo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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