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알고, 누구는 몰랐던 대법원 판결
[오마이뉴스 박소희 기자]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 권우성 |
법원과 검찰을 담당하는 법조 출입기자들은 주요 수사나 판결 내용에 '엠바고(Embargo)'를 걸어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미룬다. 이 엠바고 대상은 출입처 안에선 모두가 알지만, 밖에선 모두가 모르는 뉴스가 된다. 7월 23일 오후 2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 무효 판결이 그랬다.
형사사건에서 불기소나 불구속, 집행유예 아니면 무죄 판결 등을 이끌어낸 변호인에게 당사자가 지급하는 성공보수는 "선량하고 건전한 사회질서에 어긋난다"는 대법원의 결론은 법조계를 뒤흔들었다.
변호사 선임료의 중요한 축인 성공보수는 변호사에게도, 변호사를 찾는 이에게도 늘 고려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서초동 사람들은 찬반을 떠나 이 판례를 두고 웅성댔다. SNS에서도 관련 글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SNS에선 알지만, 기사는 보이지 않았던 뉴스
이 판결은 법조계 사람들은 알고, 일반 시민들은 모르는 뉴스였다. 7월 24일 낮 12시까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3일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 무효까지 두 개의 판결을 선고했지만, 법조 출입기자들은 이 가운데 1심과 항소심의 양형 판단이 크게 엇갈릴 때 어떻게 봐야할지를 다룬 형사사건만 당일 보도했다.
대법원 판결의 경우 즉시 처리할 사안을 선별한 다음 나머지는 선고 후 2주 동안 엠바고를 걸어 일정을 조율하기 때문이었다. 대법원이 보통 2주에 한 번꼴로 판결 선고를 하는 점을 감안한 오랜 원칙이다.
법조담당이 아니어도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엠바고로 보도 시점을 조율하는 것에 익숙하다. 출입처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엠바고를 요청하면 출입기자단 논의를 거쳐 수용 여부를 정하는 일은 종종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업계 얘기'다.
그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민감한 판결이 한 발 늦게 알려진 까닭을 궁금해 했다. 법원은 신속한 보도를 요청했지만 기자들이 '묵비'로 담합한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기사화가 늦어지면서 23일 오후 2시부터 24일 낮 12시 사이에 체결된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을 두고 논란이 불거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사법부의 최종 결론인 대법원 판결은 선고 즉시 효력을 갖는다. 언론 보도가 아닌 선고 시점이 '당연한' 기준이다. 대법원 관계자도 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이 무효라고 보는 때는) 선고 시점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형사사건 성공보수가 민법 103조가 정한 '선량한 풍속·기타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 원래부터 무효"라며 "과거 사례들은 당사자들이 이 점을 알고 있느냐 등이 걸리기에 선고 이후부터 무효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보도가 늦어져 (성공보수 약정이 무효임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23일 오후 2시 이후에 체결된 형사사건 성공보수 약정은 효력이 없지만, '여지'가 남는다는 얘기였다.
법조 출입기자들의 엠바고가 고의든 아니든 약간의 혼란을 낳은 셈이다. 출입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엠바고 뒷면에 은밀한 거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황당하면서도, 이 일이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쓴 소리를 흘려듣기 어려웠던 이유였다.
'2주 엠바고' 원칙은 국민의 알 권리와 충돌할 뿐 아니라 현실에도 맞지 않는다는 의견 역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 사용이 활발해지면서 소송 당사자나 법률대리인이 판결 내용을 직접 공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2013년 7월 법조출입사에 들어간 <오마이뉴스>는 비출입사 시절 한 변호사의 페이스북에서 의미 있는 판결을 접하고 보도하기도 했다. 출입기자였다면 엠바고 파기로 징계를 받았을 일이었다.
'양날의 검' 엠바고, 묘수는 없을까
'엠바고를 위한 변명'이 전혀 없진 않다.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대법원 소부는 하루에 적게는 수십 건, 많게는 수백 건의 판결을 쏟아낸다. 이 '물량 공세'를 모두 하루에 보도하기로 한다면, 기자들이 정작 중요한 판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수 있다. 사안 자체가 판결 더미에 묻힐 수 있고,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판결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조출입기자들은 엠바고 원칙을 유지할지를 두고 논의했다. 결론은 현행 유지. 엠바고가 '양날의 검'이긴 하지만, 넘쳐나는 판결 가운데 의미 있는 사안을 제대로 보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이유였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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