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의 '커리어 그랜드 슬램'..아름답지 않은(?) 전설

홍찬선 2015. 8. 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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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의 세상읽기] 전설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머니투데이 홍찬선 CMU 유닛장] [[홍찬선의 세상읽기] 전설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 감동할까?

정녕 이룰 수 없을 것 같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그렇게 어려운 일을 현실로 만들기까지의 피와 땀과 눈물을 떠올릴 때,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며 쿨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볼 때…

아마도 우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진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

2015년 8월3일.

우리는 LPGA 골퍼, 박인비에게 그런 감동을 느꼈다.

영국 스코틀랜드 트럼프 텐베리 리조트의 '에일사' 코스.

길고 어려운 이름만큼이나 뛰고 난다는 골퍼들을 울고 가게 한다는 이곳에서 열린 'LPGA 브리티시 오픈',

비와 강한 바람 때문에 "5번 아이언으로 친 볼이 100야드(평소의 절반 정도) 밖에 나가지 않는"(박인비) 악조건 속에서 박인비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란 감동의 드라마를 썼다.

9회말 투아웃 이후에 많은 점수 차를 따라붙어 짜릿하게 역전시키는 야구처럼, 박인비는 '3타차 공동 5위에서 3타차 우승'이라는 믿기 어려운(Unbelievable) 역전으로 3년에 걸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눈물 나는 여정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박인비 스스로도 이날 '역전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4번(파3)과 5번(파4)홀에서 연속으로 보기를 범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경기가 끝난 뒤 박인비는 이때 "올해도 (우승은) 어렵겠구나, (커리어 그랜드 슬램 달성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어쩌면 2번(파4)과 3번(파5)홀에서 연속으로 버디를 잡았을 때만 해도 '오늘은 기어이…'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인비의 힘'은 바로 이때 나왔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인 '무심타법(無心打法)'이 작동된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한 샷 한 샷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던 '대회시작 전 다짐'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번 대회 시작 전, 허리를 굽히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 '프로암 대회(프로 1명과 아마추어 3명이 한 조가 되어 벌이는 대회. 통상 프로 대회가 열리기 전에 스폰서와 골프 애호가를 위해 열린다)'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승을 욕심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고 겸손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여자 골프 역사상 7번째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란 대기록을 만든 박인비에게 '브리티시 오픈'은 넘기 어려운 강이었다. 2012년에 준우승, 2013년에는 42위(이때 4개 메이저 대회에서 한해에 우승하는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도전했지만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다), 2014년 4위(9번 홀까지 2타차 선두였지만 역전 당함)에 머물렀다. 5번 홀을 보기로 마치고 "올해도 어렵겠구나"고 자탄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5대 무기' 중 첫째인 '무심타법'이 가동되면서 승리의 여신이 그를 향해 미소 짓기 시작했다. 7, 8, 9, 10번, 네 홀을 연속으로 버디를 잡아냈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답게 그는 조용히, 착실하게 타수를 줄여 나갔다. '욕심을 갖되 탐욕을 부리진 않는다'는 '욕이불탐, 欲而不貪'(『논어』 오미(五美) 중)의 오묘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아마추어 주말 골퍼들에게 유행하는 말이 있다. 싱글(핸디캡이 한자리수(9) 이하인 골퍼)이 되기 무척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무지 쉽다. 3가지만 하면 된다. 첫째 힘 빼고 세게 친다. 둘째 천천히 빠르게 친다. 셋째 욕심을 버리고 욕심을 낸다. 정말로 쉽다. 문제는 이렇게 쉬운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정말 이른 시일 안에 싱글이 되고, 머리로 알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은 '계백장군'(계속 백돌이)에 머문다. 박인비는 (물론 아마추어 주말 골퍼와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이 3가지를 스스로의 멘탈(정신력)로 체화(體化)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승세는 14번(파5)홀에서 더욱 거세졌다. 이 홀에서 9m 거리의 긴 이글 퍼팅을 성공시켰다. 그의 두 번째 무기인 '대기만 하면 들어가는 퍼팅'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날 경기에서 그의 퍼팅 수는 24개. 거의 '그 분이 오신' 신들린 퍼팅이었다.

승부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어렵게 세팅된 것으로 알려진 16번홀(파4, 372야드). 이 홀에서 박인비는 두 번째 샷을 홀 90cm에 붙여 버디를 잡아냈다. 반면 이때까지 1타차 선두를 유지하던 고진영이 친 두 번째 샷은 그린 턱을 맞고 흘러 내려 워터 해저드로 들어가고 말았다. 세 번째 샷을 그린에 올린 뒤 퍼팅을 두 번 해 더블 보기. 순식간에 1타차 선두가 박인비로 바뀌었다. 박인비의 세 번째 무기인 '편안하고 간결하면서도 안정된 아이언 샷'이 돋보였다.

(고진영은 운 나쁘게 그린 턱에 맞은 볼이 워터 해저드에 들어갔지만, 브리티시 오픈을 정복하려면 좀 더 수양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 듯 했다. 박인비가 3전4기 만에 우승을 차지했던 것처럼…)

한번 뒤바뀐 순위는 다시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타수는 3타차로 더 벌어졌다. 그렇게 박인비의 역전 드라마는 완성됐다.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세계 여자선수로는 7번째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전설은 완성됐다.

박인비의 무기를 더 알아보자. 네 번째 무기는 드라이버 샷이다. 그의 드라이버 비거리는 LPGA에서 80위 권이다. 한동안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신지애가 LPGA를 포기하고 일본의 JLPGA로 이적한 것은 드라이버 비거리였다.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코스가 자꾸만 길어지면서 드라이버 비거리가 짧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다.

게다가 그의 드라이버 스윙도 '아름답지' 못하다. 교과서에 나온 대로 하지 않고,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샷을 한다.그만의 감각으로 드라이버의 짧은 비거리를 그만의 감각으로 커버한다. 바로 정확성이다. 가장 편안하고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스윙으로 세컨 샷을 하기 좋은 곳으로 정확하게 보낸다. 이는 그의 세 번째 무기인 아이언 샷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 덕분이기도 하다. 그의 그린 적중률이 75.4%로 4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다섯 째 무기는 바로 탄탄한 팀워크. 아빠는 그가 힘들어 포기하려 할 때 끝까지 할 수 있도록 격려했고, 엄마는 대회 기간 내내 입에 맞는 음식으로 체력을 보충해줬다. 남편은 그의 스윙에 대한 자신감을 높여주고, 캐디도 완벽하게 호흡을 함께 하는 팀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습하도록 자극하는 선수층 두터운 태극 낭자들의 쟁쟁한 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와 박인비, 오 고진영…

역전의 드라마가 끝난 뒤 박인비도 울고 고진영도 울었다. 한 사람은 기뻐서 울고, 다른 한 사람은 슬프고 안타까워서 울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울음은 결코 눈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눈물 뒤에 보여준 그들의 환한 미소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메이저 사냥꾼'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인비. 그는 LPGA에서 거머쥔 16번의 우승 가운데 무려 7번이나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비율이 무려 43.7%에 달한다. 이는 '골프 여제(여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동안 LPGA를 평정했던 애니카 소렌스탐의 13.9%(72승 중 10승)보다 3배나 높은 승률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17.7%는 물론 골프의 전설, 잭 니클라우스의 24.7%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인비가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던 날, 미국의 일부 언론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인비가 2013년에 우승한 '에비앙 챔피온십'이 2014년부터 메이저 대회에 포함됐기 때문에 아직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게 아니라는 지적이다. LPGA가 공식적으로 박인비의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인정했지만, 미국 등 서구인들의 '질투'를 일소시키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이런 왈가왈부를 일거에 해결하는 황금열쇠(Master Key)가 있다. 다음 달에 열리는 에비앙 챔피온십에서 박인비가 우승하는 것이다. 박인비는 2008년에 19살의 나이로 '최연소 LPGA US오픈 우승'의 영광을 누린 뒤 2년 동안의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다. 그 때 골프를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설득과 남편 남기협씨와의 약혼 등으로 안정을 되찾으며 2012년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27살 나이의 박인비는 이제 19살의 그가 아니다. 빠른 성공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슬럼프를 겪을 정도의 미숙함과 헤어진 지 오래다. 그는 '고승(高僧)도 놀라는 무심타법, 신들린 퍼팅, 짧지만 정확한 드라이버, 송곳 같은 아이언, 독수리 5형제를 능가하는 팀워크'라는 강력한 '필승의 5대 무기'를 갖고 있다.

박인비는 이런 5대 무기로 기록 만들기에 나설 것이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란 전설은 이미 과거가 됐다. 이제는 LPGA 메이저 15승 돌파, 5대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사상 첫 '수퍼 그랜드 슬램' 달성이라는 새롭고 즐거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탄탄대로는 아니다. 그에게 남은 적은 적지 않다. '과거의 영광'과 '기록에 대한 욕심'이 자칫 슬럼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서 받은 상금 45만 달러(5억2400만원)를 포함해 4년 연속 20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챙겼다. 이는 자칫 '이제 됐다'는 만족감을 불러올 수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다.

『주역(周易』은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기제(旣濟)괘(䷾, 63번째)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새로 시작한다는 미제(未濟)괘(䷿, 64번째)로 마친다. '이제 됐다'는 만족감과 자만심이 지금까지 이뤄온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참을 인(忍)자를 열 번 새겼다."

박인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마다 새겼다는 말이다. 인(忍)자를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 백번을 새기며 LPGA의 위대한 역사를 쓰는 게 남은 도전이다. 27살. 그는 아직 젊다.그런 도전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힘과 실력, 그리고 심력(心力)까지 모두 갖췄다.

전설은 새로운 전설로 이어질 때 더욱 아름다운 전설이 된다.

홍찬선 CMU 유닛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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