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단지>-상처받은 여성이 웹툰의 주인공인 이유

2015. 8. 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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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서 위로를 바라는 주인공들이 많다는 건, 그리고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어디에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여성들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웹툰에 상처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레진코믹스에서 연재하는 휘이 작가의 <숨비소리>, 소망 작가의 <자해클럽>은 위로가 필요한 이들의 이야기다. <숨비소리>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든 가난과 폭력의 굴레에 사로잡힌 모녀의 이야기이고, <자해클럽> 역시 교실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자해로 서로 고통을 공유하는 이야기다. <숨비소리>도 <자해클럽>도 공교롭게도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두 작품 모두 작가도 여성이다. 두 작품 모두 논픽션을 전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만화 안에서 작가의 자기고백을 듣는다. 웹툰이기 때문이다.

작가·주인공·작품 제목 모두 <단지>

웹툰은 허구적 서사물로 독자를 만나기 이전 작가의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며 시작됐다. 웹이라는 공간에 작가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냈고, 독자는 이 만화를 공유하며 웹툰이 시작됐다. 일정한 수련을 거친 뒤 제한된 제도의 틀 안에서 데뷔를 하고, 편집자와 함께 작품을 만들던 출판만화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가 연결되듯, 개인의 만화가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웹툰은 일상과 공감이 상호작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만화에서 위로를 바라는 주인공들이 많다는 건, 그리고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어디에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여성들이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웹툰에 상처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단지 작가의 자전적 만화 <단지>의 한 장면. / 레진코믹스 제공

지난 7월 8일 무료 1화 연재가 시작돼 7월 30일 현재 미리보기 유료까지 총 12화가 공개된 단지 작가의 <단지> 역시 상처받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만화다. <단지>는 “단지, 31세, 분가 10개월째”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좀 헛갈리겠지만 작가 이름도 ‘단지’고 주인공 이름도 ‘단지’이며, 작품 제목도 <단지>다. 모두 같은 존재다. 작가는 작가, 주인공, 작품의 제목을 통일해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밝힌다.

만화는 네칸만화처럼 규칙적인 네모 칸을 연속시키는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권윤주 작가가 자신의 홈페이지 ‘스노우캣’에 일기만화를 연재한 이후 일상툰은 칸 대신 공간에 자유롭게 그림을 배치해온 데 비해 <단지>는 규칙적인 칸을 선택했다. 칸 안에서는 주인공 단지의 서사를 담아내고, 칸 바깥에 내레이션을 넣어 칸 안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렇게 칸으로 서술이 분리되면, 칸 바깥의 서술에 대해서 독자들은 만화 안의 인물을 매개하지 않고 직접 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칸 안의 서술은 만화의 주인공 단지를 통해 진행되고, 칸 바깥의 서술은 (주인공과 동일한 인물이지만) 작가를 통해 진행된다. 특정 상황이 있다면, 칸 안의 단지(주인공)는 그 상황을 재연하고, 칸 바깥의 단지(작가)는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반복되는 서술은 <단지>의 자기고백을 독자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특정 상황을 재연하고, 그 상황에 대한 본인(주인공이자 작가)의 마음을 다시 설명함으로써 <단지>는 아주 구체적으로 작가의 자기고백과 독자를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가정에 만연해 있는 폭력과 그에 따른 고통을 표현해 독자와 공유한다. / 레진코믹스 제공

<단지>는 앞에 소개한 <숨비소리>나 <자해클럽>처럼 상처받은 여성이 주인공이다. 앞의 두 작품이 극의 구조를 가져와 상처와 극복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 비해 <단지>는 대뜸 아버지가 입원한 응급실에 달려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몇 칸 안 되는 응급실 장면에서 오빠와 남동생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단지를 보여준다. 12시가 다돼 엄마가 도착하고, 엄마는 대뜸 “낼 아침에도 일찍 나와”라고 명령한다. 집으로 돌아와 전화로 엄마와 다툰 단지는 마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분가한 이유가 “사실은 엄마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칸 안에는 “시끄러!!”, “꼴보기 싫어!!!!”, “너!!!!, 나가!!!!”라는 말풍선과 함께 화를 내고 소리지르는 엄마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묘사된다. “28살까지 엄마 때문에 우는 일이 많았다”고 설명하고, 방문을 잠그고 우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 다음 칸에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래놓고 이럴 때만 날 제일 먼저 찾아”라고 독자를 바라보며 말하는 단지를 그린다. 그 다음 기억에선 분가해 처음 만난 오빠가 전세금 액수를 듣더니 “넌 돈이 그렇게 있는데 집에 아무것도 안 해 줘?”라고 묻는다. 엄마한테 잘하라는 오빠의 말에 “아, 알았어…”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칸 바깥에서는 “난 또 거기서 병신같이 웃었다”고 설명한다.

칸 안의 묘사와 칸 바깥의 설명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작가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듯 만화를 끌어간다. 오빠와 남동생과는 다른 노골적인 차별의 기억을 칸 안에서 묘사하고, 칸 바깥에서는 이에 대해 담담하게 논평한다. 작가의 충격적인 자기고백을 한참을 듣다 보면, 우리는 내 안의 어떤 상처를 발견한다. 작가가 솔직하게 드러낸 상처는 우리 마음의 다른 상처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듯<단지>는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작가의 자기고백이다. <단지>의 주인공 ‘단지’는 칸 안에서 말을 하고, <단지>를 그린 ‘단지’는 칸 바깥에서 설명한다. 칸 안에서 스스로 말하기가 상처를 ‘되돌아보는 행위’라면, 만화 밖의 독자들에게 말 걸기는 ‘대화하기’다. 작가는 10화에서 자신이 한참 힘들었을 때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자기와 유사한 사연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며 묻는다.

“음… 너 말야. 어때? 괜찮아? 볼 만해? 위로받고… 있어?”

작가가 <단지>에서 상처를 고백하는 건, 그리고 고백을 넘어 <단지>처럼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건 자신의 고백을 들어주는 구체적인 누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처럼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여준다. 아빠는 “밖에 나가선 참 잘”하는데 안에서는 전형적인 가부장에 불과했다. 아빠와 똑같이 닮은 오빠는 “30여년간 오빠는 나를 통해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며 자랐”을 사람이다. 갈등의 핵심에 있는 엄마는 늘 아들들만 바라본다. 엄마는 “내가 한 일을 칭찬하기보단 미처 못한 일을 꼬집어 화를 낼 뿐”이었다. 상처는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자기고백이 투영된 캐릭터 ‘단지’는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독자들을 바라보고 씩 웃는다. 독자들은 <단지>를 보며 ‘단지’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상황에 분노한다. ‘단지’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단지’의 상처를 바라보며 내가 위로받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단지>는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며, 상처 입은 독자들을 구체적으로 호명한다. 서로의 상처에 반응하는 고통의 연대,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만화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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