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토크] 둘리아빠 김수정 "창의성? 애들 입 막는데 그게 나오겠나"

김용운 2015. 8. 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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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공룡 둘리' 작가 김수정 화백 인터뷰국내 첫 만화캐릭터 박물관 '둘리뮤지엄' 개관"아이는 실수하고 잘못 깨달으며 성장고길동도 말썽꾸러기 둘리 간섭 안해""웹툰 등 만화가 등용문 넓어졌지만내공있는 신인 많지 않더라"
지난달 24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둘리뮤지엄 개관식에서 만난 ‘둘리아빠’ 김수정 화백은 10년이 걸려 탄생한 ‘둘리뮤지엄’을 반기면서도 “요즘 어른들이 아이들을 재단해 수동적으로 만든다”며 “그런 분위기에선 결코 창의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서울 도봉구 쌍문동 쌍문근린공원에 이현세·허영만 등 유명 만화가들이 야외천막 아래 모여 앉았다. 앞쪽에 마련한 단상에 오른 이는 김수정(65) 화백. “둘리의 고향에서 문을 연 둘리뮤지엄 개관식에 와주셔서 모두 고맙습니다.” 김 화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 내로라하는 만화가들이 대거, 그것도 이처럼 이른 시간에 한자리에 모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대부분 밤새 마감을 하는 만화가들의 오랜 습관 때문이다.

그만큼 둘리뮤지엄 개관은 한국 만화계에서 큰 경사다. 한때 어린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던 만화가 국내 문화콘텐츠로서 당당하게 입지를 굳혔다는 상징적인 일이라서다. 국비와 시비 등 약 180억원의 예산을 들인 둘리뮤지엄은 연면적 4151.43㎡(약 1255평)에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세운 만화를 테마로 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국산 만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박물관이 국내에 설립된 것도 처음이다.

개관식을 마치고 김 화백을 만나 둘리와 둘리뮤지엄 탄생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김 화백은 인터뷰 중 한국 만화계의 발전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기공룡 둘리’를 사랑해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창의성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분위기에 대해선 우려했다.

- 둘리뮤지엄이 문을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살던 동네가 바로 쌍문동이었다. 1983년 ‘보물섬’ 4월호에 처음 ‘아기공룡 둘리’를 연재할 때 둘리가 바로 쌍문동을 가로지르는 우이천으로 빙하를 타고 내려왔다는 설정을 했다. 그래서 둘리의 고향이라 할 쌍문동에 둘리뮤지엄이 들어서게 된 거다. 사실 둘리뮤지엄 개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0년 전쯤 둘리테마파크를 도봉구에서 짓고 싶다고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너무 상업적인 색채가 짙어 주저하던 중 지자체장이 바뀌면서 유야무야됐다. 결국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취임하면서 복합문화관을 표방한 둘리뮤지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우이천에 둘리벽화도 그렸고 쌍문근린공원도 둘리근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하철 4호선 쌍문역도 둘리역으로 병기한다고 한다.

- 만화도시를 표방한 부천이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정도로 둘리에게 애착을 보이지 않았나.

△이렇게 이해하면 될 듯하다. 주민등록지는 옮겨다닐 수 있지만 본적은 한곳이다. 둘리의 본적은 바로 쌍문동이다. 내가 상경해 산 곳이 쌍문동뿐만 아니라 도봉구 방학동과 도봉동 일대였다. 그 동네 살면서 둘리를 그렸다.

- 오프라인에서 연재한 만화 중 ‘아기공룡 둘리’의 영향력을 뛰어넘은 캐릭터는 없었던 듯싶다.

△작가들은 사회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개인적으로 ‘아기공룡 둘리’ 이후 만화에서 발전한 캐릭터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아쉽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사회적 여건상 만화가가 성장하기가 어려웠다. 최근 들어 만화를 원소스멀티유스라고 치켜세우지만 정작 문화적으로 봤을 때 아직도 만화는 천대받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독특하고 개성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작가가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야 오래 고민하고 장수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

- 처음 어떻게 둘리라는 캐릭터를 구상했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에서 가져왔다. 검은 곱슬머리인 마이콜의 경우 다문화사회를 예견했다고 하지만 실은 스타가 되고 싶은 젊은 친구에게서 캐릭터를 가져온 것이다. 1980년대에도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고길동은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빠 캐릭터였다. 둘리나 또치, 도우너와 희동이 역시 주변에 있음직한 아이들을 참고해 만들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서 이룬 스토리를 만화에 담아냈다. 재미있는 점은 아이였을 때는 둘리만 보였지만 나이를 먹으니 고길동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고길동을 이해한다면 그건 아이가 아니다. 고길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다.

‘아기공룡 둘리’의 대형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수정 화백(사진=방인권 기자 bink79@).

-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잡지에 투고를 해서 뽑히거나 혹은 신춘문예처럼 등단을 해야만 만화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웹툰을 비롯해 만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길이 많다. 덕분에 만화는 많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내공이 있는 신인은 많지 않은 듯하다. 과거에는 숱하게 습작을 해 실력을 쌓아 만화가로 데뷔했는데 지금은 그런 시스템이 없다.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앉아서 만화를 그리는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작가로서 장수할 수 있다. 웹툰이 계속 성장하려면 결국 작가들의 퀄리티가 담보돼야 한다.

- 창의성이 가장 많이 필요한 분야가 만화 아닌가. 만화가로서 창의성은 어디서 비롯되나.

△창의성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능력이다. 예전에는 부모가 먹고살기 바빠 아이를 세세하게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가 다 알아서 했다. 말썽을 피우기도 하고 실수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알아서 판단하는 능력이 생긴 거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아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를 한다. 학교나 부모가 너무 많은 것을 규정해 놓은 탓이다. 둘리가 인기를 끈 것도 따지고 보면 ‘아기공룡 둘리’ 속의 캐릭터들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가 실수를 하면서 잘못을 깨닫고 성장해나갔기 때문이다. 또 어른인 고길동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면 뒷수습을 했지 간섭하진 않았다. 지금 어른들은 어떤가. 아이들을 재단해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런 분위기에선 결코 창의적일 수 없다. 아이들이 제대로 놀지 못하게 하는 걸 보면 정말로 답답하다.

- 요즘 아이들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최근 한 여자 초등학생이 썼다는 ‘잔혹동시’를 읽어봤다. 결국 어른들에 의해 폐기됐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아이도 있고 저런 아이도 있다. 그저 아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북돋워 주면 된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막아서 과연 창의성이 나오겠는가. 부모는 남을 직접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되도록 놔두는 게 좋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 그런 면에서는 과거보다 더 나빠졌다.

- 만화가로서 장수한 비결과 앞으로 계획은.

△어떤 일이든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면 오래하기가 정말 어렵다. 만화를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오래할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을 위한 그림이 있는 소설책을 구상 중이다. 가족이 있는 캐나다로 돌아가 마무리할 예정이다. 얼음별의 모험 이후 ‘아기공룡 둘리’의 극장 애니메이션도 계속 작업 중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 ‘둘리’도 더 그리고 싶은데 그건 아직 확신이 없다. 계속 작업하기 위해 날마다 운동을 하고 있다. 체력이 기본이다.

△김수정 화백은?

1950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했지만 관심사는 오직 만화였다. 1975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공모에 ‘폭우’가 당선돼 만화가로 데뷔했다. 1983년 월간 ‘보물섬’에 ‘아기공룡 둘리’를 연재하기 전까지는 ‘오달자의 봄’ ‘날자 고돌이’ ‘신인부부’ 등을 그렸다. ‘아기공룡 둘리’는 연재와 동시에 10년 동안 인기만화로 명성을 날렸다. 둘리 인형을 비롯해 1500여개 품목에 이르는 캐릭터 상품이 나왔고 TV 만화로도 제작됐으며 1995년에는 국내 최초로 만화우표인 ‘둘리우표’를 발매했다. 1996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인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제작할 때는 직접 총감독을 맡아 서울에서만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인덕대 만화애니메에이션학과 부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둘리나라 대표로 있다. 지난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만화공로상을 받았다. ‘아기공룡 둘리’ 외에도 TV 드라마로 만든 ‘일곱개의 숟가락’을 비롯해 ‘아리아리 동동’ 등의 대표작이 있다.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화백이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둘리뮤지엄 내 자신의 캐리커쳐가 그려진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김용운 (lucky@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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