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휘두르던 아빠 피해"..신림동 라이프의 시작

CBS노컷뉴스 조혜령 기자 2015. 8.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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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아이들, 좌절 그리고 희망 ①]

서울 신림동에 첫 발을 내딛은 14살 아이들은 20살이 돼도 떠나지 못한다. 처음 신림동에 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거의 같다. 돈이 없어 범죄를 저지르고, 전과가 더해지면서 아이들은 사기꾼·브로커로 전락한다. CBS노컷뉴스는 가출 청소년의 대표적 집결지인 '신림동' 심층취재를 통해, 거리의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과 그 안의 희망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밤거리 (자료사진)
지난달 24일 밤 8시 네온사인이 즐비한 신림동 밤거리. 뒷골목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던 박정태(18·가명)군이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껐다.

"아이XX, 불금인데 쉼터 통금 열나 짜증나."

담배를 터는 손 위로 15만 원짜리 도깨비 문신이 꿈틀댔다. 바닥에 침을 뱉은 정태는 생수통에 담은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충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축구부 생활을 하던 정태는 지난해 11월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서울 신림동으로 올라왔다.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한동안 집을 나갔던 엄마는 정태를 찾지 않았다. 친구 집을 전전하다 현재는 신림동 청소년 쉼터에 머물고 있다.

돈이 필요하면 스마트폰을 훔쳐 팔거나 인터넷으로 사기를 쳤다. 생각보다 꽤 많은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수백만원을 손쉽게 벌었지만 정태는 신림동에 온 지 반 년도 안 돼 전과자가 됐다.

지난주엔 이모와 삼촌이 신림동에 찾아왔지만 가족과 함께 돌아가는 대신 신림동 거리를 택했다.

"할아버지가 자주 날 찾았어요. 집에 가자고… 나는 그냥 돈이나 달라고 하고 안 갔어요."

◇ 10년 넘게 이어진 아빠의 폭력…'가출'이 아니라 '탈출'로

(자료사진)
신림동 밤거리에서 만난 또다른 10대, 김경진(18·가명)군에게 아빠는 도깨비였다.

5살, 세상을 기억할 무렵부터 경진이는 아빠의 폭력과 함께 성장했다. 맞는 도구는 다 달랐다. 아빠는 경진이가 공사장에서 직접 구해 온 각목이 부러질 때까지 경진이를 때렸다. 아빠가 휘두른 칼에 찔린 적도 있었다.

멍이 든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고 등교하는 날이 잦았다. "맞아 죽기 싫어서" 초등학교 5학년 처음 가출을 했다.

"아직도 기억나요. 100년만의 한파가 찾아온 날이었다는데, 얇은 겉옷만 입고 일주일 동안 거리에서 노숙했어요.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14살 때 처음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여기가 미국이냐"는 핀잔만 돌아왔다. 아빠는 "부모를 신고한 패륜아"라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선생님도 "아빠가 때릴 수 있는 거지"라며 경진이를 외면했다.

"14살 때까지는 내가 무조건 잘못해서 맞는 줄 알았어요. 내가 쓰레기라서, 함부로 태어나서 맞는 줄 알았죠."

경진이가 아빠의 폭력을 피해 가출을 반복하자, 먼저 쉼터를 알아봐 준 건 엄마였다. 아빠를 말리다 같이 피투성이가 됐던 엄마는 경진이를 집 밖으로 '탈출'시켰다.

그러나 쉼터에서도 폭력은 존재했다. 힘 센 형들의 협박과 갈취가 이어졌고 결국 쉼터를 나와 아는 형 집을 전전하거나 노숙을 했다. 같은 처지의 '팸(패밀리의 은어)' 친구들과 함께 신림동 밤거리를 떠돌며 술, 담배로 어른 흉내를 냈다.

신림동에 있는 지금, 경진이는 꿈을 잃어버린 자신이 가장 슬프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림을 잘 그렸어요. 그래서 나도 아빠만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살았더라면 제 꿈에 가까워 질 수 있었겠죠."

경진이는 '관심'을 강조했다. 아빠한테 두들겨 맞을 때마다 자신이 질렀던 비명에 이웃들이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을까. 경진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신림동에 모여드는 가출 10대…10명 중 7명 '부모와 갈등'

3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가출 청소년 2,1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출 원인 중 67.8%는 '부모님과의 갈등'이었다.

이 중 일부는 가족으로부터 '나가라'는 요구를 받거나 가난한 형편 탓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는 범죄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는데, 서울 신림동은 이들의 대표적인 '아지트'가 된 지 오래다.

교통이 편한 데다 값싼 모텔과 찜질방, 24시간 카페와 패스트푸드점 등 거리로 나온 아이들이 몸을 기댈 곳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1388 청소년 헬프콜'로 걸려 온 발신지를 분석한 결과 서울에서 걸려 온 2만 8,000통 중 관악구의 비율은 12.5%로 가장 높았다. 특히 신림동은 저녁 시간 관악구 전체 헬프콜의 90%를 차지했다.

가정과 학교를 등진 아이들이 범죄의 피해자이자 피해자로 뒤섞여 살아가는 신림동 밤거리.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진 아이들은 신림동이란 용광로 속에 오늘도 위태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CBS노컷뉴스 조혜령 기자] tooderigirl@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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