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감동'을 받을 때 마음은 살아납니다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김창길 기자 2015. 8. 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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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에 '음악 선생님을..' 재출간 이강숙 한예종 명예교수

거실 한편에 피아노가 있다. 여기저기 칠이 벗겨지고, 한눈에 보기에도 낡았다.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다.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79)는 피아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피아노를 갖는 게 소원이었죠. 40년 전 미국 유학 때 가진 돈을 다 털어 샀어요. 내 애인이지요.”

애초에 그는 피아니스트였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KBS교향악단과 한국 초연한 연주자다. 하지만 ‘음악학’으로 방향을 전환해 서울대에서 15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젠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92년 이 학교의 창립을 주도하고 10년간 총장으로 재직했다. 퇴임 후 2002년에는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다. 바쁘게 살아오면서 어느덧 팔순을 눈앞에 둔 그가 예전에 쓴 책을 25년 만에 다시 출간했다. <음악 선생님을 위하여>(예솔)라는 제목이 ‘참, 이강숙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음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 예컨대 음악적 감수성은 인간의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음악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등에 대한 단상을 묶은 책이다. 이 명예교수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최근 만났다.

▲ 베토벤이나 고흐의 작품 같은

이미 표현된 것은 그려진 감동

그냥 감동 유발하는 재료 불과

▲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결과물보다 결과를 만드는 과정

-‘한국의 1호 음악학자’로 불리는 경우가 많으신 것 같습니다.

“몇몇 신문에서 그렇게 썼던 것 같은데 사실은 옳지 않은 수식입니다. 서양음악 전공자 중에서는 거의 없었지만, 국악 쪽에서는 나 이전에도 음악학자들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내가 한국에서 음악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맞겠지요. 음악학은 현재의 관습적인 음악을 뛰어넘어, 음악 전반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음악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니까요.”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셨어요. 우스개 섞어 ‘영남학파의 대부’로도 불리시는데, 어린 시절에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피아노를 접하시게 됐는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난 학교에서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듣곤 했는데, 같은 반 여학생 여봉현도 노래를 잘 불렀어요. 둘이 콩쿠르에 나가서 내가 1등, 그 친구가 2등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봉현이를 집에 바래다주다가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오포산 어귀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쪽은 봉현이네 방향이고 우리집은 반대 방향이었거든. 아마 그 친구하고 더 같이 있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봉현이네 집 방향으로 가다보면 조그마한 언덕이 나오고, 꽤 잘 살던 기와집이 한 채 있었는데, 아, 그 집에서 생전 처음 듣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지 뭡니까. 그게 바로 피아노 소리였지.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오포산 언덕에 날마다 올라갔어요. 완전히 넋이 빠진 거지.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그런데 우리집에 피아노가 어디 있나요. 그때부터 교회나 학교에서 ‘피아노 동냥’을 하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거죠.”

-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시는 문제인데, 음악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인간에게는 몸과 더불어 마음도 참 중요해요. 한데 마음이 살아나는 순간은 ‘그냥 감동’을 받는 순간이죠. 인간의 마음 속에는 감동의 단추들, 아직도 타지 않은 등잔의 심지들이 굉장히 많아요. 좋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심지에 불을 당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순간에, ‘아, 나는 살고 있다’라고 느끼는 거죠.”

‘그냥 감동’은 이 명예교수가 중요하게 내세우는 개념이다. 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는 ‘그려진 감동’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에서 그냥 감동하는 순간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려진 감동’만 가치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려진 감동이란 ‘이미 표현된 감동’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베토벤이나 고흐의 작품들, 혹은 비평가의 글 같은 것들도 이미 표현된 감동에 속하죠. 사실 그것들은 그냥 감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 그냥 감동을 유발시키기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통해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됐습니다. 특히 음악 분야의 학생들은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속속 쾌거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데 문제는 콩쿠르 우승이 연주자로서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콩쿠르 1등이 궁극적인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콩쿠르 자체가 상품화된 경연대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또 1등을 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니, 모순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도 참 고민스럽습니다. 내가 더 젊다면, 20여년 전에 학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뛰어난 젊은이들의 활동 기회를 만드는 일을 열정을 쏟고 싶습니다. 한데 보다시피 이제 늙었습니다.”

-평생을 음악 교육자로 일해오셨습니다. 지금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결과물을 가르치지 말고 결과를 만드는 과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위대성을 강조하지 말고, 베토벤이 교향곡 5번 2악장에서 한 줄의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습작들을 했는지를 알려줘야 하는 거죠. 그는 고치고 또 고치면서 작곡했어요. 그중에는 형편없는 선율, 그래서 북북 지워버린 것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과정을 가르쳐야 학생은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데 교사가 외려 학생의 예술성을 죽이는 경우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교사는 교실의 살인자가 되어선 결코 안됩니다.”

이 명예교수는 “집에 온 손님에게 대접이 소홀해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다. 현재 부인 문희자 여사는 중환자실에서 투병중이다. 이 명예교수는 “다행스럽게도 오늘 아침에 아내가 산소호흡기를 떼어내고 나를 알아봤다”며 한시름 놓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학기부터 다시 강단에 선 그는 “20년만에 다시 하는 강의”라면서 “손주뻘인 1학년 학생들이 참 이쁘다”고 말했다.

<글 문학수 선임기자·사진 김창길 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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