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물은 간 데 없고 체인점만 나부껴..사라진 '대학가'

CBS노컷뉴스 김민재 기자 입력 2015. 8. 2. 06:00 수정 2015. 8. 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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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한 영철버거 고려대 본점 앞을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다.
"영철버거 폐업 소식을 들은 다음날, 대학원 연구실에 갔더니 다들 헐, 설마 같은 반응 뿐이었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랐다"

고려대 앞 명물로 꼽혔던 영철버거 폐업 소식을 아쉬워하던 고려대 05학번 이명준(30) 씨는 "처음 입학해 중앙광장에 앉아 새터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학생회 선배들이 영철버거를 잔뜩 사왔던 기억이 난다"며 영철버거와의 추억을 쏟아냈다.

◇ 맛집 아닌 가족이었던 영철버거마저… 막걸리 흥취 잃은 고려대

2000년 안암역 부근 노점상으로 시작해 대규모 프랜차이즈 사장이 된 영철버거 이영철(49) 씨의 성공스토리는 고대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

단돈 900원, 1000원에 고기와 야채를 가득 담은 영철버거를 팔던 이씨는 2004년부터 "학생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겠다"며 해마다 수천만원씩 선뜻 장학금을 내놓아 고려대 가족처럼 대접받았다.

덕분에 고려대에서는 MT나 축제, '고연전' 같은 굵직한 학교 행사마다 학생회가 영철버거를 대량 공수해 나눠먹는 일이 전통처럼 자리잡았다.

하지만 상전벽해로 바뀐 학교 앞 풍경은 이미 영철버거의 폐업을 예고하고 있었다.

고려대 대학가의 중심이었던 정문 앞에서 제기시장의 막걸리 선술집들이 사라지고, 단돈 30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던 십수년된 기존 밥집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대신 프랜차이즈 체인점들로 뒤덮인 이공계 캠퍼스 인근 참살이길이 고려대 상권의 중심이 됐고,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던 고려대 학생들이 칵테일과 '치맥'의 맛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정문 옆 옛 보세옷가게 골목. 지금은 화장품 로드샵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 대학가 사라진 대학 앞 풍경… "학생이 주인공인 거리는 이제 없어"

오랫동안 대학생들과 동고동락하던 대학가 '명소'들이 자취를 감춘 건 고려대만의 일이 아니다.

한양대 04학번 진동민(30) 씨는 "한양대만의 명소라고 부를만한 곳은 생각나지 않는다"며 "예전에는 주로 '한양시장'을 즐겨찾았지만, 왕십리역에 대규모 쇼핑몰이 들어선 뒤로 분위기가 확 변했다"고 말했다.

왕십리역부터 한양대 사거리를 잇는 재래시장 '한양시장'은 한때 한양대를 대표하던 명물로, 허름한 분식집과 밥집 곳곳엔 '이모'와 '삼촌'을 찾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한양대의 입구격인 왕십리역에 민자역사가 들어서고 대형 쇼핑몰이 세워지면서 기존 상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었다.

서울 동부 최고의 대학가로 꼽혔던 건국대 입구 역시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점령한 지 오래.

건국대 02학번 박진용(33) 씨는 "90년대 건국대 입구는 락카페나 음악 다방이 가득한 '젊음의 성지'였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온갖 프랜차이즈 업소만 가득하다"며 "영등포, 종로와는 다른 대학가만의 개성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인 사이에 관광명소가 된 이화여대는 학생들을 위한 기존 상권 대신 중국인 맞춤 상권으로 뒤바뀐 특이한 사례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은하미용실' 등 고급미용실들과 정문 옆 보세옷가게로 가득했던 이대 앞 거리는 이른바 '이대 나온 여자'의 자부심이었다.

이대 07학번인 송혜정(27) 씨는 "미용실, 옷가게 덕분에 이대 앞이 가장 세련된 대학가로 꼽혔다"며 "여대생 특유의 취향에 맞는 한 카페, 빵집들도 함께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대 상권 쇠락의 결정타는 2008년 완공된 ECC 복합단지 캠퍼스였다. 어지간한 편의시설은 모두 ECC 안에 마련되자 학생들의 학교 밖 상권을 찾을 일이 없었다.

송씨는 "순식간에 이대 앞 식당들이 망하고 그 자리에 화장품 로드샵이나 중국인 관광객용 대형 한식당만 들어섰다"며 "이대 앞 거리는 더 이상 이대생들이 즐기는 공간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 학생들이 대학에만 남아서, 대학을 떠나서… 사라진 대학문화

이처럼 '대학가'의 퇴조 원인에 대해, 2000년대 이후 각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캠퍼스를 대형화하고 학내 편의시설을 고급화하면서 학생들이 대학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고려대 05학번 이명준 씨도 "고려대에도 타이거 플라자, 중앙광장 등에 상업시설이 즐비해 쇼핑몰인지 대학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라며 "대학가가 유흥가처럼 변했다면 대학은 시장으로 변했다"고 비판했다.

70년대부터 신촌을 지켜온 '독수리다방'을 대를 이어 운영하는 손영득(33) 대표는 "뒤집어 말하면 업주들이 '학생들이 다른 곳 가겠나'라며 안이하게 운영해 변화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학이 노골적으로 대학가 상권을 흡수하기도 하는데, 신촌 홍익문고 박세진(49) 대표는 "대학마다 입점한 대형서점에서 전공교재를 독점 판매해 이제 서대문구 전체에 남은 서점은 홍익문고 1곳뿐"이라고 한탄했다.

반대로 학생운동이 몰락하고 학생회, 동아리가 무너지면서 대학만의 독특한 문화를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학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연세대 08학번 김호수(25)씨는 "이제는 학생들이 대학가에 남다른 감정을 갖지 않는다"며 "연세대의 경우 1학년은 모두 송도캠퍼스에서 지내다보니 선배에게 소개받은 단골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커피, 휴대전화, 맛집탐방 등의 키워드가 대학문화를 대체했다"며 "학생들이 취업경쟁 속에 사회와는 다른 대학만의 문화를 직접 가꾸고 향유하는 여유를 잃었다"고 씁쓸해 했다.

[CBS노컷뉴스 김민재 기자] te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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