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의 조르게가 외치지 않았을까? "바가야로"

김형민 입력 2015. 8. 1. 00:42 수정 2015. 8. 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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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에서 첩보원이란 대개 그림같이 잘생긴 사람이고 아무리 어려운 일도 너끈히 해내는 멋쟁이로 등장하지만, 현실의 첩보원이나 정보요원은 그렇게 멋있는 직업이 아니야.

하나 예를 들어줄까? 냉전 시대, 즉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무렵, 소련의 실력자가 미국을 방문하면 미국의 정보기관인 CIA는 하수관을 통해 실력자의 배설물을 확보(!)해서 조사했다고 해. 적성국 국가원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훌륭한 시료(?)이기 때문이지. 아마도 CIA 국장 방에는 며칠 뒤 다음과 같은 근사한 보고서가 올라갔을지도 몰라. '소련 수상 아무개스키는 채식보다는 육식을 즐기고 소화 기능이 나이에 비해 떨어져 있으며 기생충에도 감염돼 있음.'

이렇게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과거 한국 중앙정보부 슬로건) 이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미국 CIA 슬로건)고 부르짖으면서도 항상 '부주의한 말을 조심하라. 누군가 듣고 있다'(영국 MI6 슬로건)는 긴장 속에서, '기만을 통해'(이스라엘 모사드 슬로건) 생존해 나가는 이들이야. 그게 정보기관원의 숙명이지.

국가 간 정보전이 불꽃 튀도록 치열하게 펼쳐진 20세기 현대사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역사를 바꾼' 스파이들을 발견하게 돼. 그 쟁쟁한 스파이 가운데 아빠는 우선 리하르트 조르게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네. 독일 사람이지만 투철한 공산주의자이고 '사회주의의 조국' 소련을 위해 일했지.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영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조르게는 소련 정보국의 지시를 받고 독일 신문의 특파원 신분으로 일본에까지 스며들었어.

일본에서 그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스파이 조직을 건설해. 독일의 동맹국인 관계로 일본 정부는 독일의 일급비밀을 공유하는데, 리하르트 조르게는 그걸 몽땅 가로챘지. 심지어 히틀러가 상호 불가침 약속을 깨고 소련을 전면 침공하는 날짜까지 빼내 모스크바에 전달했지. 하지만 스탈린은 고개를 저었어. '그럴 리가 없다!' 독일군은 준비 안 된 소련군을 거침없이 몰아치며 드넓은 러시아 땅을 짓밟고 스탈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

수천㎞ 밖 시베리아에도 소련군 병력이 있지만 일본의 침공이 두려워서 함부로 옮길 수도 없었어. 그때 해답을 준 것도 조르게였지. '일본은 시베리아에 욕심이 없습니다.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겁니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조르게의 말을 믿고 시베리아의 소련군을 독일과의 전쟁으로 돌릴 수 있었지. 이걸로 전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일본에서 빼낼 정보는 더 이상 없다'라고 할 만큼 대활약을 하던 조르게는 결국 일본 정보기관에 덜미가 잡히게 돼. 하지만 소련은 이 유능한 스파이를 외면해버려.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오.' 조르게는 일본 땅에서 사형을 당한단다.

독일인이지만 소련에 충성하고 일본에서 인생의 절정을 보낸 언어 천재 조르게의 유언은 일본어였어. 사형대 앞에서 그는 일본어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니까. '소비에트, 붉은 군대, 공산당.' 그는 자신을 버린 소련을 원망하지 않고 그가 신봉한 깃발과 이상을 되뇌며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어.

조르게는 뛰어난 스파이였지만 그를 스파이로 만든 소련 정보기관은 그렇지 않았어. 소련의 정보기관은 조르게가 죽어가면서까지 읊조린 '소비에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 지도자 스탈린에게만 충성하는 사냥개로 전락한 지 오래였거든. 스탈린 개인의 판단에 따라 소련의 수억 인구를 빈틈없이 감시하며, 스탈린을 거스른다는 이유만으로, 스탈린에게 불평을 토로한다는 고발만으로 수많은 이들의 뒤통수에 총알을 꽂았단다. 물론 '소비에트의 배신자'를 처단한다는 핑계로 말이야. 조르게를 스파이로 만든 사람도 그 후계자도 모두 목숨을 잃고 조르게의 아내조차 유형지로 끌려가 죽었어.

일급 스파이 조르게가 예고한 독일의 침공 날짜에 소련 정보기관의 수장 베리야는 이렇게 스탈린에게 아첨하고 있었단다. '우리 국민과 저는 독일이 결코 소련에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당신의 현명한 예언을 기억합니다.'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가치와 공산주의라는 이상에 헌신하는 유능한 정보원들 덕에 소련 정보기관은 세계 최고의 정보망을 자랑했어. 하지만 정작 그 가치와 이상을 배신한 정보기관은 외부의 적에 무능하고 내부에는 잔혹한 '찌질이'로 전락해서 급기야 조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던 거야.

국정원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

요 몇 년 사이 우리나라 정보기관 국정원도 세계 정보기관 역사를 세 번씩이나 새로 쓰는 '쾌거'를 이루고 있어.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국정원장은 '인터넷을 청소한다는 마음으로' 야당 후보와 지지자에 대한 저열하고도 사악한 댓글 공작을 지시했단다. 스탈린에 반대하면 다 반동분자라 우기던 소련 정보기관처럼, 현 정부에 반항하면 다 종북(從北)이라는 식이지. 영화 <베를린>에서 폼 나는 첩보원 한석규 아저씨가, <7급 공무원>의 김하늘 언니가 골방에 들어앉아 '좌익들 목을 치고… 전라도 홍어 같은 사람들…' 어쩌고 하는 댓글을 다는, 이 지질하다 못해 처절한 풍경을 상상해보렴.

둘째로, 2013년 6월25일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최고 수장인 국가정보원장은 야당이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이유로 '조직의 명예를 위해' 국가 2급 기밀이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자기 손으로 공개해버렸단다. 얼마나 많은 스파이들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고 상대방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혹시 누가 비밀을 들추려 하면 '내 무덤을 열고 보라'고 호통을 쳐야 할 스파이 대장이 '우리 조직의 명예를 위해' 국가 비밀을 널름 쏟아놓아 버리는 희한한 풍경. 저승의 조르게는 일본어로 외치지 않았을까. '바가야로.'

세 번째 쾌거는 현재진행형이지. 우리가 가진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몽땅 해킹할 수 있는 장비를 국정원이 몰래 사들이고 사용했다는 의혹 말이야.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국정원 직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러자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 원칙이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체가 죄악시되는 한국 정보기관원 '일동'은 '정치 공세 때문에 동료가 죽었다'며 공동성명을 발표한단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스파이 공동성명. 전 세계 정보기관들은 지금 이 순간 열심히 한국 국정원을 분석하고 있을 거야. '과연 한국 국정원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아빠는 정보기관은 꼭 필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국정원이 지금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건 능력이 아니라 신뢰일 것 같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국정원 슬로건)이란 소련 정보기관이 자행한 것처럼 '권력과 권력자를 향한 맹종'이 결코 아니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국민에게 부당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야. 그들은 그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네. 아빠도 한 시민으로서 그들의 반성을 요청하고 싶다. '먼저 고민하라. 그러면 그 뒤가 즐거워질 것이다'(先憂後樂:일본 정보기관 공안조사청 슬로건).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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