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초월 라이벌]쌍방울 VS 한화, 만년 꼴찌 탈출기

김경윤 2015. 7. 3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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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스포츠서울DB)
[스포츠서울 김경윤기자]양지가 있는 곳엔 음지가 뒤따르는 법. 냉정한 스포츠세계엔 일등과 꼴찌가 공존한다. 환희로 가득찬 프로야구 역사에도 승수 쌓기의 재물이 된 팀들이 시대 별로 존재했다. 1980년대 삼미, 1990년대 쌍방울, 2000년대 롯데, 2010년대 한화가 그들이다. 이중 쌍방울과 한화는 근 20년의 편차를 두고 비슷한 사이클을 보였다. 두 구단이 보여준 꼴찌 탈출의 과정은 비슷한 면이 상당히 많다. 어찌보면 시공간을 초월한 ‘꼴찌 탈출기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겠다.
쌍방울 초대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감독(스포츠서울DB)
◇쌍방울의 시작과 한화 전성기의 마지막을 맡은 김인식 감독

쌍방울의 시작은 1989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쌍방울은 김인식 감독(현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장·프리미어12 대표팀 감독)을 영입하며 팀의 모양새를 갖췄다. 모기업은 야구단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쌍방울은 김 감독의 요청으로 1990년 2월 17일부터 3월 14일까지 프로팀 최초로 하와이 전지훈련을 떠나기도 했다. 전지훈련은 선수들의 기술 향상 뿐만 아니라 팀 분위기를 만드는데 적잖은 영향을 줬다. 쌍방울은 6월 21일 교통사고 참사로 2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런 비극을 딛고 2군리그 1위를 차지했다. 리그가 끝난 뒤엔 미국 플로리다 교육리그에 국내팀으로는 최초로 단일팀 참가를 했다. 쌍방울은 이 기간 동안 한국 혼성팀을 지도한 조 알바레즈 코치와 정식 계약을 했다. 1군 리그 합류 직전엔 걸프전 발발로 각 구단이 해외전지훈련을 취소하는 과정에서도 하와이 행을 강행했다.
일련의 훈련과정은 김인식 감독의 강력한 요청으로 진행됐다. 당시 김 감독은 선진 야구의 합리적인 훈련 방식과 팀 내부 분위기를 결집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쌍방울은 1991년 1군 첫 무대에서 52승 71패 3무 정규시즌 6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았다.
지난 2007년 한화 사령탑 시절 김인식 감독 / 스포츠서울DB
김인식 감독은 한화 전성기의 마지막을 맡기도 했다. 2005년 한화는 마운드의 전력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김 감독은 단점을 보강하는 대신 강점인 공격력 극대화에 집중했다. 외국인 선수 2명을 타자인 제이 데이비스와 마크 스미스로 메운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마운드는 특별한 전력 강화책 대신 베테랑 선수들의 재기를 유도했다. 당시 송진우, 문동환, 정민철, 김해님, 최영필 등이 활약했다. 은퇴 뒤 현역 복귀한 지연규에겐 마무리 보직을 맡겼는데, 지연규는 20세이브를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활약상을 보였다. 한화는 2005년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후 한국으로 복귀한 구대성과 특급 신인 류현진의 가세로 2006년 준우승, 2007년 3위의 호성적을 거뒀다.
쌍방울 소속 시절 간판타자로 활약했던 김기태(현 KIA 감독) / 스포츠서울 DB
◇쌍방울과 한화의 추락 과정

쌍방울은 1992년, 끝도 없이 추락한다. 쌍방울은 41승 84패 1무 승률 0.329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역대 팀 최다실책(135개), 시즌 최다패, 최다 피홈런, 최다 실점, 최다 병살타 등 거의 모든 최하위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시 쌍방울 프런트의 비이성적인 구단 운영이 비판을 받았다. 쌍방울은 4월 말, 5할 승률을 기록하며 4위까지 진입했지만 4월 28일 마무리 조규제의 허벅지 부상으로 하락세를 탔다. 7연패를 기록한 5월 5일, 이용일 구단주대행은 김인식 감독이 버젓이 선수단을 진휘하고 있는데도 신용균 감독을 만나 감독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쌍방울의 어설픈 선수 영입도 도마위에 올랐다. 쌍방울은 허약한 마운드를 보강한다는 방침 아래 재일동포 장훈의 주선으로 일본 긴테쓰에서 강창남(일본명 고야마), 황태호(히야마) 등 두 명의 투수를 영입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강창남은 국내 프로야구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약을 무시한 채 곧바로 출국해버렸다. 황태호는 1경기에 출전한 뒤 바로 방출될 만큼 기량이 좋지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와 프런트의 패착 등이 겹치면서 쌍방울은 추락했다.

한화의 추락 과정도 비슷했다. 한화는 2000년대 후반 리빌딩에 실패하면서 ‘어디부터 손봐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전력이 악화됐다. 한화는 2000년 대 후반 구대성, 송진우, 정민철 등 배테랑 선수들의 역투로 팀 성적을 냈지만, 그들이 연이어 은퇴하자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특히 리빌딩을 감안해 유망주들의 군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했어야 했는데, 이 과정이 순탄치 안았다. 2010년엔 웃지 못할 상황이 연달아 벌어졌다. 정규시즌 중이었던 2010년 7월 주전 내야수 송광민이 영장을 받고 현역으로 입대한 것. 그만큼 병역관리는 허술했다. 한화는 2012시즌 당시 무려 22명의 선수가 군복무를 할만큼 교통정리에 실패했다.
한화는 수 년간 신인드래프트 하위 순번 지명을 포기하는 등 신인 선수 영입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8 신인드래프트에선 6라운드 이하 지명을 포기하기도 했다. 타구단들이 2군 전용 구장을 짓는 등 유망주 팜 양성에 심혈을 기울일 때에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한화는 외국인 투수 선발 과정도 그랬다. 모그룹의 인색한 투자로 수준 이하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한대화 감독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한화의 흑역사를 만들었다.
쌍방울 선수 시절 조규제/ (스포츠서울DB)
◇흑역사의 마지막은 내부 폭발

팀 성적이 바닥을 치자 부풀어오른 내부의 고름이 터지기 시작했다. 쌍방울은 1993년 정규시즌을 앞두고 김준환, 최영상 코치를 제외한 모든 코칭스태프를 대거 교체했다. 팀 창단 멤버 이승희, 김봉근, 김평호, 김만후, 서창기를 은퇴시켰고 외국인 선수 영입과정에서 의견차를 보였던 신용균 감독과 한동화 수석코치는 불협화음을 냈다. 쌍방울은 1993년 4월 10일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0-17의 참패를 당하면서 최악의 악몽이 시작됐다. 신용균 감독은 1년 만에 퇴진했고 시즌 중반 강길룡, 송인호 등은 트레이드 됐다. 1994년에도 6월까지 2할 대 승률을 기록할 만큼 크게 흔들렸다. 당시 쌍방울의 6월 팀 방어율은 7점대를 기록했다. 1995년엔 개막 직전 이용일 구단주 대행과 한동화 감독의 갈등을 시작으로 구단은 풍비박산이 났다. 당시 쌍방울 이의철 부회장은 자신이 추천한 심리 코치를 선수단이 배척한 것에 대해 격노해 5월 15일 한동화 감독, 백종관 사장, 박영규 단장을 동시에 해임하는 사상 초유의 인사를 단행했다. 내부 갈등과 어수선한 분위기,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쌍방울은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한화가 겪은 터널의 끝자락도 매우 어두웠다. 최악의 전력난 속에서 2011년 공동 6위라는 결실을 얻었지만 2012년 이후 다시 추락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일본에서 돌아온 김태균, 팀 두 번째 외부 프리에이전트(FA) 송신영, 특별 안건으로 영입한 박찬호가 합류했지만 순위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결국 8월 28일 한화는 한대화 감독을 경질했고 한용덕 수석코치에게 감독 대행을 맡겼다. 한화는 2012년 시즌 후 거물 김응룡 감독과 김성한 수석코치, 이종범 코치 등 다수의 해태 출신 인사를 영입하는 등 코칭스태프 물갈이에 나섰다. 한화는 류현진의 미국 진출과 박찬호의 은퇴, 양훈의 입대로 선발 투수 3명을 동시에 잃었고, 그 결과 극심한 전력난에 시달렸다. 전대 미문의 개막 후 13연패도 이때 나왔다. 한화는 2군 전용 구장인 서산 구장 완공, 적극적인 FA영입 등 투자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단번에 암흑기를 탈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쌍방울 사령탑을 맡은 김성근 감독이 제주도 전지훈련지에서 직접 투구폼을 보여주고있다. / 스포츠서울DB
◇청부사 김성근 감독의 혹독한 훈련

쌍방울은 1995년 시즌 중반 구단 매각설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1996년 정규시즌을 앞두고 그룹 이의철 부회장이 나서 구단을 맡았다. 이 부회장은 직접 김성근 감독의 영입을 주도하면서 리바운드의 여건을 조성했다. 당시 쌍방울은 신인 스카우트에서 사상 최고액인 14억원을 투자하며 전력 보강에 나섰다. 최정환, 박주언, 신영균에겐 억대 계약금을 안겼다.
암흑기 탈출의 토양을 얻은 김성근 감독은 혹독한 훈련과정을 통해 선수단 변신을 꾀했다. 김성근 감독은 최근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에도 쌍방울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유일한 길은 훈련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쌍방울 선수들이 받은 훈련의 강도는 현재 한화 선수들이 받은 그것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1995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제주도에서 마무리 훈련을 진행했다. 당시 제주도 오라구장의 훈련 여건은 좋지 않았다. 당시 쌍방울 박상열 투수코치(현 한화 코치)는 “우리 코치들과 선수들이 천막을 가져와 간이 불펜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비가 많이 내렸는데, 빗속에서도 훈련을 하라는 김성근 감독의 지시가 있었다. 매우 힘들었지만 그만큼 선수들이 단련됐고, 기량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쌍방울은 1996년 팀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만들었다. 최다 기록이 5승이던 팀 연승 기록은 13연승(8월)으로 확대됐고 팀 성적도 70승 54패 2무 승률 0.563으로 창단 이후 최고 성적을 거뒀다. 당시 쌍방울은 정규시즌 2위를 차지했다. 단순히 팀 성적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쌍방울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홈 관중 20만명을 웃도는 27만명의 야구팬을 끌어모았다. 관중수는 전년대비 무려 40%가 증가했다.
당시 쌍방울은 1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15명이나 나왔는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마운드 운영 능력과 포수 박경완의 급성장 때문이라는 것이 야구인들의 시각이었다. 박경완은 당시 조범현 배터리코치(현 kt감독)의 작품이었다. 조 감독은 “당시 코칭스태프로서 내 파트를 유심히 살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쌍방울 마운드가 살아난 건 박경완만 잘 한 건 아니었다. 당시 팀 분위기가 한번 해보자는 도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조 감독의 말마따나 당시 쌍방울 선수들의 투혼은 대단했다. 삼성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김실과 김현욱, 오봉옥은 타선과 마운드에서 맹활약했고 베테랑 박노준은 후십자 무릎 인대가 끊어져 절뚝거리면서도 전반기 종료까지 출장을 감행했다.
홈 승률이 높은 것도 ‘팬들에게 실망을 시키면 안된다’는 선수단 내부 분위기가 짙었기 때문이다. 당시 쌍방울은 전주 경기에서 39승 23패 1무 승률 0.627로 8개 구단 중 홈승률 1위를 기록했다. 올시즌 대전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현 한화와 상당히 흡사한 면이 많다.

최약체 팀에서 정상급 팀으로 도약한 쌍방울은 예기치 않은 ‘IMF사태’로 다시 무너지게 된다. 쌍방울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2010년대 최약체 팀으로 꼽히는 한화는 리바운드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다. 쌍방울의 암흑기 탈출을 이끌었던 주인공들은 오렌지 유니폼을 입고 1996년 그 때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bicycl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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