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옥 기자의 야구&]'야신 신봉자'의 변심
김선섭 감독 제공 |
20년의 세월이 흐른 2015년. 김성근 감독의 지옥훈련이 또다시 프로야구를 휩쓸고 있다. 최근 3년간 꼴찌였던 한화가 쉼 없는 훈련으로 반전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것이다. 선수 혹사라는 비난도 있지만 예찬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옥훈련은 또다시 프로야구의 유일 신앙이 되면서, 팬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야구계에서 색다른 방식의 성공신화가 탄생했다.
김성근 감독의 애제자였던 김선섭 감독은 지옥훈련의 신봉자였다. 2010년 모교 광주일고 감독에 오른 뒤 매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 캠프를 차렸고, 영화 ‘실미도’급 훈련을 지휘했다. 선수가 아프다고 하면 “이겨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얼마 전 돌변했다. 훈련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던 그가 훈련시간을 과감하게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 오전 훈련은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대체하고, 야간 훈련은 아예 없앴다. 오후에 서너 시간의 훈련이 전부다. 또 그 짧은 훈련 시간을 쪼개 스펀지 공으로 변화구 적응 훈련을 시킨다. 과학적인 훈련이라고 했지만 훈련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훈련’ 대신 ‘휴식’의 가치를 중시하고 ‘혹사’ 대신 ‘효율’에 집중한 것이다. 애제자 서건창(넥센)의 소개로 넥센 이지풍 트레이너를 만난 게 돌변의 계기였다. 근육이 피곤하면 기술이 거의 습득되지 않는다는 이 트레이너의 말에 변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충분한 휴식 뒤 집중력 있는 훈련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자료를 보고 생각을 굳혔다. 혹사의 끝은 부상이라는 말은, 팔꿈치 부상 등으로 일찍 은퇴한 자신의 경험으로 금세 이해됐다.
처음에는 시련도 있었다. 훈련을 줄이고, 이상하게 보이는 훈련을 하자 학교에서 반대하고 나선 것. 사실 스스로도 불안했다. “훈련을 더 시키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과연 이 방식이 통할까라고 고민도 많이 했죠.” 하지만 혈기왕성한 나이의 선수들은 서너 시간의 훈련에 무섭게 집중했고, 체력과 기술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검증 무대는 지난주 대통령배였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광주일고 선수들은 김 감독에게 첫 우승컵을 안겼다. 김 감독은 “선수들의 움직임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지옥훈련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휴식과 효율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비단 야구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듯하다. 산업화시대에 선진국을 추격하던 한국에 노동 시간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야근을 하는 게 미덕이었다. 그런데 추격이 거의 완료된 이 시점에서는 효율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번아웃신드롬(탈진증후군)’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휴식’과 ‘효율’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주 김성근 감독과 그의 제자 김선섭 감독의 모습에서 과도기에 서 있는 우리 사회가 보였다.
윤승옥 기자 touch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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