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피카소 김흥수 1주기전..추상·구상 만난 '누드의 완성'

이향휘 2015. 7. 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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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즘의 창시자 예술 재조명..인사아트센터서 대작 30여점 전시

“음과 양은 서로 상반된 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어울리게 될 때 비로소 완전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피카소’이자 ‘하모니즘의 창시자’라 불린 김흥수(1919~2014)의 1977년 ‘하모니즘’ 선언 내용이다. 그는 “추상미술의 등장 이후 세계의 화단은 구상주의와 추상주의가 서로 반목적인 상극을 이루어왔다. 사실적인 표현은 틀 속에 얽매여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추상적인 표현은 우연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 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의 영역을 넘은 오묘한 조형의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고 적었다.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흘렀다. 가나문화재단은 ‘김흥수 1주기전:하모니즘’을 서울 인사아트센터 1층에서 3층에 걸쳐 연다. 1950년대 후반 초기작부터 2000년대 말년작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작품 수는 30여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대작이고, 뿜어내는 기가 대단하다. 여성의 누드를 그린 드로잉에서조차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번 전시는 그의 드라마틱한 개인사에 묻힌 예술세계를 재조명하자는 취지가 강하다. 1층은 1997년 유화 ‘미의 심판’이 걸렸는데, 무려 가로 7.15m짜리 1000호가 시선을 압도한다. 오른쪽에 누드의 여성 13명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고, 왼쪽엔 추상적인 화면이 구성돼있다. 그는 평생 동양과 서양, 음과 양, 남자와 여자, 추상과 구상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추구했다.

모자이크를 연상케 하는 콜라주 풍의 유화작업을 선보인 1960년대, 구상과 추상, 객관적 재현과 주관적 내면세계 등 이질적 요소를 한 화면에 병치시킨 ‘하모니즘’을 보여준 1970~80년대에 비해 1990~2000년대는 간결하고 명쾌한 선으로 그려낸 인체소묘가 많이 등장한다. “여성 누드 말고 추상 같은 것을 진지하게 그려보라”는 일부의 조언도 들었지만 그는 끝내 거부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숱한 여성 편력과 43세 연하 부인과 결혼, 또 그 부인이 자신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는 충격 속에서도 김흥수는 일관되게 탐미 행보를 펼쳤다. 장고 춤을 추는 여인, 온화한 반가사유상, 불상과 탈 등 한국문화의 원형을 그린 한편 여성의 누드화도 1000여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내 예술의 모체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인간이라고 답한다. 그 중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대상은 여성,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몸에 울긋불긋 옷을 입힌 것이 유화라면, 소묘란 옷을 벗었을 때 여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보여주는 알맹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가 하모니즘을 추구하게 된 것은 오랜 해외 생활을 하며 정체성을 고민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는 17세의 나이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6.25 전쟁 충격으로 리얼리즘 표현기법에 한계를 절감한그는 19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야수파, 입체파 등을 섭렵했다. 이때 다채로운 색채에 대한 감각을 터득했다. 이어 1967년부터 12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교직과 창작활동을 병행했고, 귀국할 무렵인 1977년 ‘하모니즘’을 선언했다. ‘하모니즘’은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사상이 모태로, 구상과 추상이 공존할 때 비로소 화면이 온전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한 화면에 대상은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정신은 추상으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1993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가 국내에서 인정받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는 “1979년 귀국 후 10여년 간 일부에서 ‘저것도 그림이냐’는 비아냥거림을 나에게 보냈다”고 토로했다. 1919년생인 그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된 것은 아흔이 넘은 2010년이었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 (02)736-1020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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