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계기된 '고승호'는 정말 보물선일까

임아영 기자 2015. 7. 2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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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호(高陞號)는 길이 72.6m로 2134t을 적재할 수 있는 증기선이었다. 1883년 청나라는 영국 배로우 조선회사에서 건조한 고승호를 임대해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진압용 군사수송선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임대료는 4만 파운드. 그러나 고승호는 1894년 7월 25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경기도 안산 풍도 앞바다에 침몰한다. 이 사건은 청일전쟁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세기 말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탈로 국력이 약해졌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 진출을 꿈꿨다. 청과 일본은 1885년 ‘조선에서 군대를 동시에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텐진조약을 체결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군대를 요청했다. 청이 군대를 보내자 일본도 군사를 보냈다. 고승호는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병사 1000여명을 싣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풍도 앞바다에 숨어 있다가 고승호를 침몰시켰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을 잘 보여주는 고승호 침몰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일본과 중국, 영국, 프랑스 등에 관련 기록물이 전해오고 있다.

당시 고승호에는 청나라의 군자금으로 쓰일 은덩이와 은화가 600t이 실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다에 가라앉은 군사수송선은 100여년간 보물선으로 뒤바뀌었다. 이 때문에 고승호 보물 소동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 그리고 근래까지 약 100년에 걸쳐 계속됐다. 1920년대부터 선내 물품을 인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2001년에도 민간에서 대규모로 유물을 인양했다.

침몰하는 고승호. 문화재청 제공.
풍도해전으로 침몰하는 고승호 삽화. 문화재청 제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인천시립박물관과 공동으로 내달 4일부터 10월 4일까지 해양유물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고승호, 격랑의 청일해전’을 연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배에서 인양한 유물과 역사 기록물 1000여점이 공개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보물선’ 고승호가 아닌 ‘수중문화유산’ 고승호의 잊힌 역사를 소개하고 근대 위기로 점철된 대한제국과 동아시아의 아픈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먼저 1부 ‘고승호의 항해와 침몰’은 고승호 침몰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살피고 배에서 나온 은덩이와 무기류 등을 통해 고승호의 성격을 알아본다. 2부 ‘위기의 조선’과 3부 ‘이방인들의 전쟁’은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국내외 정황과 침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조명하고 마지막 4부 ‘고승호, 침몰 그 이후’는 그동안 이뤄진 수중 탐사와 수중문화유산으로서 고승호의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고승호에서 출토된 유물. 일본에서 제작한 커피잔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고승호에서 출토된 유물.
고승호에서 출토된 유물. 중국 청대 건륭연간에 주조된 동전 건륭통보다. 문화재청 제공.
고승호 출토된 실탄 및 탄피. 문화재청 제공.
고승호는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서해에 잠들어 있다. 2001년 유네스코는 보물을 찾으려는 탐욕으로 바닷속에 잠든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중문화유산 보호협약’을 제정했다. 문화재청은 “고승호가 ‘보물선 소동’에서 벗어나 당시 국제정세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자료이자 인류 역사의 발자취인 귀중한 수중문화유산으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온전히 보호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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