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난민' 된 어르신들, 카페·햄버거 가게 전전

이정원 기자 2015. 7. 28. 0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운데 갈곳은 없고.." 음료 시켜놓고 종일 앉아있어 커피값 없어 공원 갈 땐 그늘 차지하려 새벽에 나와

"벌써 오늘 커피숍이랑 햄버거집 세 군데째 옮겨 다녔어. 날이 너무 더운데 갈 곳이 없어서…."

지난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하모(65)씨는 테이블에 콜라 한 잔을 놓고 다른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씨는 "이 날씨에 공원에 앉아 있다가는 큰일 난다"며 "아침 9시에 집에서 나와 저녁 5시까지 햄버거집을 옮겨다니는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음료만 시켜놓고 있다"고 했다.

중복(中伏)인 이날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탑골공원 인근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전문점은 하씨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로 북적였다. 무더위를 피해 카페·패스트푸드점을 돌아다니는 '폭염 난민(難民)'들이다. 평소 종묘공원으로 출퇴근했다는 박모(71)씨도 이번 주 내내 종로 3가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박씨는 "답답하니깐 지하철 타고 공원으로 오는 게 벌써 5년째 습관이 됐다"면서 "공원에서 또래 노인들과 장기를 두곤 했지만 요즘은 너무 더워서 함께 여기(패스트푸드점)로 온다"고 했다.

노인들은 실내로 대피하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이모(73)씨는 "매번 주문할 순 없어서 가끔은 그냥 앉아 있지만 손자뻘 되는 점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점원들이 자주 오지 않는 2층에 앉아 있다"고 했다. 그나마 하루 3000~4000원의 음료값을 선뜻 지불할 여유가 있는 노인들만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을 찾는다. 김모(73)씨는 "밥값도 빠듯해 무료 급식을 먹는데, 하루 음료값 3000원을 쓰는 것은 부담스럽다. 습관이 될까 봐 패스트푸드점엔 아예 안 간다"고 했다. 대신 김씨는 매일 아침 7시 집을 나선다고 했다. 그는 "공원 그늘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져서 새벽에 나온다. 늦어서 그늘을 뺏기면 지하철역에서 하루종일 버텨야 한다"고 했다.

매장 측은 난처하다는 입장이다. 한 커피전문점 직원은 "어르신 중 일주일 내내 종일 앉아 계시는 분도 있다"면서 "날도 덥고 갈 곳이 없으니 시음잔도 드리며 편의를 봐 드리지만 가끔 너무 큰 소리로 얘기하셔서 다른 손님에게 불편을 끼칠 때도 있어 난감하다"고 했다. 인근 영어학원에 다니는 대학생 안모(26)씨는 "끼니를 때우러 패스트푸드점을 찾을 때마다 빈 테이블을 다 차지한 할아버지들 때문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고 했다. 공원을 관할하는 종로구청은 "무더위 쉼터 등 어르신들을 위한 폭서(暴暑) 대책을 세우긴 했지만 종로구에 사시는 분들만 대상"이라며 "공원에 모여 계신 분들을 위한 대책이 따로 마련되진 않았다"고 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