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인터뷰]'살아있는 전설' 박신자가 전하는 농구이야기

오종택 2015. 7. 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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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뉴시스】오종택 기자 = '한국여자농구의 살아있는 전설', '여자농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박신자(74) 여사가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딴 여자프로농구 컵(CUP)대회인 '2015 우리은행 박신자컵 서머리그' 개막에 맞춰 후배 선수들을 격려하고 대회를 빛내기 위해 6일 속초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새하얗게 샌 그의 머리카락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모습에는 한국 나이로 75세인 고령의 나이를 잊을 정도다. 한때 세계 여자농구계를 평정한 기백은 여전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열린 소감을 묻자 그는 "기쁘다"는 짧은 한 마디를 던진 뒤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박 여사는 "아마 어떤 운동선수도 같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대회를 한다는 것은 지금 내 나이에 내 생애에 보너스다. 아주 기쁘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박 여사는 선수로 뛴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여자농구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1964년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월드 베스트5'에 선정된 그는 3년 뒤에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에서는 한국대표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준우승팀 선수로는 지금도 이례적인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는 업적을 남겼다. 그에게 직접 세계선수권 MVP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대표팀은 소련과의 결승전을 치른 뒤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트로피도 품에 안아보지 못하고 체코를 빠져나와야 했다.

공산권 국가인 체코는 수교도 맺지 않은 상태이였기 때문에 48시간 안에 그곳을 나오지 않으면 강제 추방이 된다는 괴소문(?)을 들은터라 대표팀은 부랴부랴 짐을 싸서 서독을 거쳐 프랑스로 이동해야 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 한숨을 돌리고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대회 MVP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우승국가인 소련 선수들을 제치고 준우승 국가인 한국대표팀의 에이스에게 최우수선수의 영예가 돌아간 것이다.

당시 서구권 선수들은 평균신장이 190㎝에 달했다. 장신 숲 사이를 176㎝에 불과한 상대적으로 작은 동양 여성이 헤집고 들어가 골망을 가르는 것을 농구 선진국조차 신기하게 생각했을 법하다.

박 여사는 당시를 두고 "'내가 농구의 최고 선수가 됐구나' '지금 그만 둬도 올라 갈 곳이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MVP에 선정됐을 당시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영광스럽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꼽았다. 그러면서 이번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열린 오늘도 그때만큼이나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최고 선수로 우뚝 선 순간 그의 나이 만 26세였다. 박 선수는 이미 1964년에 은퇴를 결심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한창 선수생활을 할 나이이지만 당시에는 여고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이면 결혼 적령기였다. 25살 전후로는 노처녀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 여사보다 나이 많은 선수는 없었다고 하니 그에 대한 기대나 의존도가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박 여사는 그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도 나가 결승에서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가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 여사는 "당시에는 항상 팀워크를 강조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로 운동을 했다. 국가대표로 뛰는 동안에도 뭘 하는지는 잘 모르면서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운동했다"고 강조하며 국가대표란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2의 박신자를 발굴하자는 취지의 대회이니 만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만한 선수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만 무한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운동선수라면 제2의 아무개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제1의 누구가 되고 싶을 것"이라며 "주위에서는 내가 키도 크고 소질이 있어 잘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우리 팀의 어떤 선수보다 연습을 제일 많이 했다"고 선수 시절 부단한 노력이 여자농구 전설 박신자를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눈여겨본 선수가 있느냐는 물음에 "집안일을 하느라 최근 10년여 동안 농구를 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말한 그는 "앞으로 열심히 봐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후배 선수들에 대한 조언을 던졌다.

박 여사는 "농구는 슛만 잘하는 선수가 제일 쉬운 선수다. 한자리에서만 (플레이)하는 선수가 그렇다"면서 "어시스트나 패스, 타이밍에 맞춰서 리바운드도 하고 중요한 때 컨트롤도 하고 타임을 불러 이기게 하는 선수가 득점하고 스타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선수보다 잘하는 선수다"라고 말했다.

한국여자농구의 현주소를 묻자 저변 확대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남자 농구는 대학 팀들도 있고 부모님들과 젊은 학생들이 선호했지만 여자는 대학팀이 없다"며 "어느 운동이나 저변이 넓은 상황에서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있는데 (중고교 팀)수가 줄어들고 대학팀이 없는 것과 저변 확대가 안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라고 직언했다.

끝으로 만 74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관리를 잘한 비결을 묻자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답한 박 여사는 무리한 운동대신 꾸준히 걷고 미국 노인정에서 배운 태극권을 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있다고 했다.

한국여자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박신자 여사는 여자농구의 부흥기를 이끌었고 지금은 후배들이 즐겁게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대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에 인생의 황혼기를 행복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ohjt@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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