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가 만든 집
↑ 갤러리에 걸린 작품은 복잡한 작업실을 배경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또 다르다. 집에도 갤러리의 느낌을 구현해보고자 벽을 화이트로 마감했다. 찾아가는 길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주소상으로는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이들의 집 바로 앞에 다 와서는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골목을 마주보고 늘어선 인쇄소들은 저마다 작업이 한창이다. 알싸한 잉크와 종이 냄새, 철컹거리는 기계 소음이 여기가 바로 수많은 공업사들의 오래된 터전 을지로라는 걸 말해주었다. 눈앞의 인쇄소 옆으로 좁다랗게 난 계단이 입구라는 걸 집주인과 거듭 통화를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건물 5층에 있다는 집까지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복도는 미로 같았고, 잿빛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온통 하얀 페인트를 칠한 환한 공간이 나타났다. 건물 밖에서도 올려다보았지만 겉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복도에 잠시 익숙해졌던 눈이 확 트였다. 창틀에 놓인 허브 조무래기들이 햇빛을 받으며 연두색 잎을 틔우고 있었다. 작가 성상은과 박지현의 집이다. 대학교 조소과에서 동기로 처음 만나 졸업도 나란히 하고 뉴욕에 같이 건너가 공부를 계속한 두 사람은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이런저런 곳에 작업실을 옮기며 작품을 만들어왔다. 함께한 시간과 작업을 해온 시간이 거의 비슷하니 서로의 스타일은 눈 감고도 척이다. 몇 해 전 박지현의 작업실을 옮기려 할 때, 마침 을지로에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같이 둘러보다 딱 괜찮은 곳이 있었어요. 계약을 하고 건물에서 나오는데 어, 골목 풍경이 왠지 익숙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제가 5살 때까지 살았던 동네인 거예요. 계약한 작업실의 옆 건물이, 5살 때 살던 바로 그 집이었어요. 대학 시절부터 재료 구하러 을지로를 그렇게 다녔어도 이 골목에 들어와볼 생각은 못했는데, 신기했죠. 수십 년 만에 연이 닿은 동네여서일까, 계속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결국 부부는 1년 전 즈음 성상은의 어릴 적 그 집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건물 5층에 있었던 집은 그동안 인쇄소로 쓰이고 있었다. 그곳을 다시 집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외벽만 빼고는 모든 것을 허물고 들어냈다. 창문을 새로 내고, 집 안 구조를 바꾸고, 페인팅을 다시 하는 작업은 시공사에 의뢰했다. 하지만 그동안 두 사람이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평생 조각과 예술을 업으로 삼은 두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시공사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의뢰인이었을 것 같다. 집 크기를 실측해서 설계도를 직접 그려오는가 하면, 페인트칠이 고르지 못한 곳은 귀신같이 찾아내는 매의 눈을 가지고 을지로 일대에서 가지각색의 재료를 구해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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