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국민, 구제금융 긴축 거부..'OXI(반대)' 60% 이상 압도적 승리

아테네|정유진 특파원 입력 2015. 7. 6. 02:57 수정 2015. 7. 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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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에 대한 두려움도 그리스 국민들의 긴축 거부 의지를 꺾지 못했다. 5일(현지시간) 치러진 그리스 국민투표 중간 개표율이 80% 이상을 넘어선 새벽12시30분 현재, ‘OXI(반대)’가 61% 이상의 표를 얻어 39%에 그친 ‘찬성’에 압도적 승리를 거둘 것이 확실시된다. 이번 투표 결과는 지난 5년간 긴축으로 연금과 임금이 큰 폭으로 삭감되고 실업률과 빈곤율이 치솟는 등 경제가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른데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유로 채권국들은 투표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긴급 회의를 열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5일 치러진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앞서나가고 있다는 중간개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아테네|AP연합뉴스

아테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은 축제 분위기

이날 오후7시 개표가 시작되자마자 ‘반대’는 일찌감치 ‘찬성’을 따돌리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는 승리를 예감한 ‘반대’ 지지자들이 하나 둘 그리스 국기를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는 흥겨운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둥글게 모여 “오히(OXI)” “치프라스”를 연호하며 기쁨에 겨워했다. 사람들은 북소리에 맞춰 다 함께 “채권자들은 부채 계약서를 들고 이 나라를 떠나라”는 노래를 일제히 합창하며 발을 굴렀다. 국회를 배경으로 승리의 기념사진을 찍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반대’를 찍었다는 대학원 전자공학 석사과정인 만토스(31)는 “집에서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듣다가 ‘반대’가 승리할 것 같아서 이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광장으로 뛰어나왔다”면서 “먼 훗날 이 날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승리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나는 그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고 싶다”고 말했다.

5일 치러진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아테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행렬. 아테네|로이터연합뉴스

가족들과 함께 광장에 나온 변호사 야니스 가스노스티노(51)도 “반대가 아슬아슬하게 이기면 이기더라도 협상력에 힘이 실리지 않았을 텐데, 큰 폭의 차이로 압승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유로 채권국들은 더이상 고리대금업자 노릇을 중단하고 그리스를 인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성’을 찍은 그리스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냐고 묻자 “우리 더이상 겁내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실업자라는 마리아(42)는 이날 투표에서 ‘찬성’을 찍었지만, 광장에 나와 ‘반대’를 찍은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그는 “기본적으로 치프라스의 통치철학에 공감하지만, 투표 결과가 ‘반대’로 나올 경우 유로존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초래될까봐 두려워서 ‘찬성’을 찍었다”면서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리스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분열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스 아테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에 모인 인파들

유로 채권국들, 대응책 마련에 고심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반대’의 승리가 확실시되자마자 이날 밤 TV 생중계를 통해 “반대 결정은 민주주의는 협박받을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며 은행 영업재개 등을 위해 즉시 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48시간 내에 채권단과 긴축완화 협상을 성공시키겠다”고 말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일 그리스 부채를 탕감(헤어컷)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고 평가한 보고서를 언급하면서 “이번에는 협상 테이블에 부채 문제를 올릴 때”라고 말했다.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일방적인 긴축을 강요하기 부담스러워진 유로존 채권국들은 고심에 빠졌다.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유럽연합 집행위)는 그동안 “‘도박꾼’ 치프라스가 그리스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며 그리스 국민들에게 ‘찬성’을 찍을 것을 종용해 왔지만, 투표 결과가 ‘반대’의 승리로 결정되면서 더이상 치프라스를 예전처럼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측된다.

그동안 “국민투표 결과 ‘반대’가 나올 경우 그리스는 그렉시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유럽은 그리스 국민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뉘앙스에 미묘한 변화를 드러냈다. 그는 독일 주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부도 상태에 처한 그리스의 공공서비스가 유지되고 그리스 국민이 생존을 위한 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유럽연합(EU)이 긴급자금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긴급 회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더이상 그리스에 우리의 세금을 낭비하지 말라”는 독일 국민들의 강경한 여론과 “더이상의 긴축은 불가능하다”는 그리스 국민들의 국민투표 결과가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진 그가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날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앞으로 또 다시 가혹한 현실과 맞닥뜨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8일 ECB가 긴급유동성지원 한도를 동결한 후 그리스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그리스 현지 언론들은 은행들이 현금입출금기에 채워넣을 돈이 없어서 ECB가 당장이라도 유동성을 지원해 주지 않을 경우 그리스 경제가 곧 완전히 올스톱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스는 이날 ECB에 긴급유동성 지원한도 증액을 긴급 요청했지만, ECB가 어떤 결단을 내릴 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가디언은 “경제 전문가들은 ECB가 일단 이 요청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 경제학자는 그렉시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75%라고 예측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그렉시트 우려로 6일 개장되는 세계 증시가 크게 출렁거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스 아테네 의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긴축 반대’ 깃발을 휘날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리스 서민과 청년들의 승리

이번 투표 결과는 그리스 서민층과 청년들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표 전날까지만 해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찬성’과 ‘반대’는 거의 동률을 기록해 박빙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긴축으로 인한 실업과 경제난에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청년층과 도심 외곽지역 및 농촌 지역의 저소득층이 ‘반대’에 몰표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아테네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 중 ‘찬성’을 찍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대부분 교수, 전직 은행원, 연구원 등 비교적 전문직 출신의 중산층이었다. 또 찬성에 표를 던지겠다는 노년층과 달리, 대학생 등 청년들은 “더이상 긴축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실업자와 워킹푸어 신세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면서 반대에 찍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 그리스 현지 메가TV 등의 실시간 중계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 소득 상위층은 절반 이상이 ‘찬성’표를 던진 반면, 소득 수준이 낮을 수록 ‘반대’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아테네 중심부는 찬성 응답율이 높았지만, 아테네 외곽과 지방으로 갈수록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테네|정유진 특파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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