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또 오셨네요 허허" 서울 공항지구대 한준순 경위, 길 잃은 치매 스승 8개월째 직접 집까지 배웅

박세환 기자 2015. 7. 4.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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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오후 3시쯤 서울 강서구 공항지구대 앞에 한 택시가 멈춰섰다. 희끗한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A씨(85)가 천천히 내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후 2시30분쯤 지구대 인근에서 택시를 잡은 A씨는 ‘어디까지 가시느냐’는 기사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도 어눌해 알아듣기 힘들었다. ‘치매’ 기운이 완연했다. 계속 대화를 시도하다 지친 택시 기사가 가장 가까운 공항지구대로 어르신을 모시고 온 것이다.

그때 공항지구대 소속 한준순(55) 경위는 막 지구대를 나서던 참이었다. A씨를 발견한 한 경위는 씨익 웃으며 다가가 손을 잡았다. “선생님 또 오셨네요. 저 한준순입니다.” 놀라는 택시 기사에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잘 아는 분이에요. 집에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치매 노인과 경찰. 과연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 여주 여강고등학교에 다니던 한 경위가 갓 3학년이 될 무렵 A씨가 교감으로 여강고에 부임했다. 학생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지만 온화한 말투와 성격으로 인기가 높았다. 한 경위가 졸업하고도 A씨는 이 학교에 10년 더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과 제자가 다시 만난 건 정확히 35년 만이다. 지난해 11월 A씨가 김포공항 근처 버스에서 계속 내리지 않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공항지구대로 인계된 A씨의 얼굴을 본 한 경위는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체형에 갸름한 얼굴, 오똑한 콧날과 약간 처진 눈…. 한 경위는 단번에 은사를 알아봤다. 즐거웠던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자주 들춰본 고교 졸업 앨범이 35년 전 선생님을 기억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신분증을 보자 이름도 똑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한 경위가 “저 모르시겠냐”고 묻자 A씨도 깜짝 놀라며 손을 맞잡았다고 한다. 기막힌 우연에 눈물이 핑 돌았다는 한 경위는 “그렇게 정정하고 커 보였던 선생님도 나이를 먹고, 저도 나이를 먹어서 이렇게 만나니 세상이 참 좁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강서구에서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A씨는 혼자 집에 있게 될 때마다 문을 열고 나와 대중교통을 탄다. 그러다 길을 잃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3∼4차례 공항지구대로 이송된 선생님을 볼 때마다 한 경위는 직접 댁에 모셔다 드린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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