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은 외국 계좌에.. 국가 부도? 신경 안 쓴다"

아테네/한경진 특파원 2015. 7.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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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 맞은 그리스, 한경진 특파원 르포] 그리스 부유층에게 디폴트 사태는 '남 얘기' 英부동산 구입 문의 급증 대학생들, 메르켈 욕하면서도 獨서 취직하려 독일어 공부 전문직 '脫그리스' 심각

2일(현지 시각) 그리스 아테네 중심가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 있는 아티카 백화점. 살구색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엔 별다른 외관 장식도 없었다. 오래된 '동네 대형 상가' 같은 분위기였다.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긴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1990년대 서울의 백화점을 보는 듯했다.

밥을 먹기 위해 식품관의 한 비스트로(대중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종업원이 건넨 메뉴판을 받아들고서야 왜 사람들이 "아테네 부자들이 모이는 최고급 백화점"이라고 소개했는지 깨달았다. 쇠고기 스테이크가 32유로(4만원), 화이트와인 한 잔이 8유로(1만원)였다. 출장 전 생활한 독일 베를린의 백화점 식품관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30~40%는 더 비쌌다. 하루 예금 인출금이 60유로(약 7만5000원)로 제한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식사를 하는 것일까?

◇호화 생활 여전한 부유층

바로 옆 탁자에서 혼자 밥을 먹던 할머니는 샤넬 핸드백에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은행 영업정지로 불편하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돈을 외국 은행 계좌 여러 군데에 나누어 놓았고, 미리 찾아놓은 현금도 많다"고 말했다. 또 "돈 있는 그리스 사람들은 대부분 재산을 해외로 옮겨 놓는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아테네 시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달리자 에게해(海)가 눈앞에 펼쳐졌다. 해변의 '아테네 마리나 요트클럽'에는 흰색 호화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택시기사 아드레아스(42)씨는 "대부분 아테네에서 선박·물류 사업을 하는 부자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배를 타고 나가면 어떤 섬의 긴 백사장에는 파라솔 하나만 꽂혀 있는데, 부자들의 개인 해변"이라며 "우리와는 다른 '신의 세계'에 사는 듯하다"고 말했다.

1일 현지 언론에 실린 기사에 그리스인들은 또다시 분노했다. 지난 30일 디폴트(채무 불이행) 선언을 앞두고 영국 런던의 부동산을 구매하려는 그리스인들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외 자산은 흔히 탈세의 수단이 된다. 지난달 그리스 정부가 제안한 경제 개혁안에 대해 국제 채권단이 "탈세(脫稅)를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이 작다"며 퇴짜를 놓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리스를 등지는 고급 두뇌들

2일 오전 찾은 그리스 명문인 아테네 대학교 캠퍼스에서는 활기찬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낡은 건물마다 스프레이로 "(채권단 협상안 찬반 국민투표에서) OXI(아니요)를 찍어라"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철학 전공 다니(21)는 "요즘 돈 있는 학생들은 외국에 어학 공부를 하러 나간다"고 했다. 일자리를 위해 외국으로 떠나려는 학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독일어 학원은 수강신청이 힘들 정도로 붐빈다. 긴축을 강요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일행을 꿈꾸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현재 그리스의 청년 실업률은 49.7%. 시위 현장에서 만난 많은 그리스 젊은이들이 출중한 영어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현재 무직"이라고 말했다.

의사·과학자·건축가 등 전문직들의 해외 이탈도 심각하다. 스위스에서 의사로 일하는 발리(31)씨는 테살로니키 지역에서 의대를 다니다 스위스로 건너갔다. 발리씨는 전화 통화에서 "15~20년이 지나서야 고국에 돌아갈지는 몰라도 지금 현재로서는 그리스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두뇌 유출'은 당장의 디폴트보다 그리스엔 더 큰 악재다. 그리스에선 20세기 초반 경제난으로 국민들이 미국·남미 등으로 대거 이민을 떠난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그렉시트로 '새로운 디아스포라(대이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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