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시리즈] 링 밖에서 '더 위대해진' 복서 조지 포먼(下)

이용수 2015. 7. 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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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9월에 포먼은 호세 로만을 1라운드 KO로 때려잡고 첫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2차 방어전의 상대는 캔 노튼이었다. 노튼은 73년 3월과 9월에 알리와 2연전을 치르던 선수다. 그는 첫 경기에서 알리에게 생애 두 번째 패전 기록을 선물했고 2차전에는 판정패를 당했는데, 그의 실력은 당시의 알리와 사실상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노튼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왼손을 허리 근처까지 내리며 오른손은 안면의 왼쪽을 커버하는 필리 쉘 자세를 사용하는 선수였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왼손과 위에서 내려찍는 오른손을 주무기로 기동력과 테크닉, 방어 면에서 대단한 경지에 올라있던 노튼이었지만 포먼에게는 이빨이 박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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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공격시도를 마치 파리라도 쫓는 듯한 느낌으로 걷어내면서 묻지마 폭행을 가하던 포먼은 2라운드 중반에 도망치는 노튼을 추격하며 라이트 큰 것을 하나 적중시켰고 충격을 입고 움직임이 굳어진 노튼에게 포먼의 특기 중 하나인 라이트 어퍼가 연이어 박히면서 승부의 추는 급격히 기울었다. 노튼이 겨우 일어났지만 포먼은 상처입은 상대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2라운드 1분 50초경 포먼의 무자비한 강타를 연속으로 허용하면서 두 번째로 쓰러진 노튼은 카운트가 소진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1974년 10월 30일은 복싱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로 기록되어 있다. 무하마드 알리가 병역거부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무패의 젊은 챔피언 포먼을 KO로 꺾으며 왕위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이 경기가 킨샤샤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알리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박계에서도 3:1로 포먼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알리를 이긴 두명의 선수인 프레이저와 노튼이 모두 포먼을 상대로 불과 2라운드 만에 완파되었기 때문에 알리에게 큰 기대를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링 위에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날의 알리는 링 위에 로프의 탄성이라는 형태로 숨겨져 있던 비밀의 공간을 활용해 포먼의 공격을 흘리는 혁신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차후에 로프 어 도프라고 명명될 알리의 최신 전술이었는데, 포먼은 이것에 말려 헛스윙을 너무나 많이 하게 된다. 알리는 포먼의 펀치가 나오는 타이밍에 로프에 기대면서 측면으로 몸을 틀어 포먼의 펀치를 계속 흘렸다. 그러던 8라운드 종반, 지쳐서 녹초가 된 포먼에게 알리의 날카로운 연속기가 적중되었고 쓰러진 포먼은 그대로 KO패를 당했다.

이 승리로 알리는 영웅이 되었다. 말컴 X와 교류하며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으며 반전주의를 행동으로 보여준 알리는 단지 떠버리 복서가 아닌 시대의 아이콘으로 재평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너무나 예외적인 결과였기 때문에 음모론도 많이 나왔다. 블랙 판터나 알리를 지지하는 무슬림계열 흑인 과격 단체들이 포먼을 협박했다는 설도 있고 마피아가 포먼을 설득해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포먼 스스로는 알리와의 경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정상적인 경기였으며 본인은 어떠한 압력이나 조작도 없이 알리에게 진것이라 말했다. 알리와의 싸움에 대해 포먼은 CNN을 통해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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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먼: 제가 펀치를 휘두르면, 사실 대부분은 미스되었지만 그래도 상대방들이 픽픽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전 제가 역사상 최고로 터프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헤비급 파이터가 될 거라 믿었죠. 제 주먹 한 대는 다른 선수의 20대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이르에서 알리와 싸우기 위해 준비하던 당시 전 그 경기를 간단한 운동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3라운드? 2라운드? 최대로 잡아도 3라운드 반 정도면 그를 KO시킬 수 있을 거라 자신했어요. 그때 전 제 인생 전체에서 가장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포터: 당시 복싱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면요. 알리가 그날 당신에게 12번의 라이트 리드를 던졌다고 하는데요. 그들에 의하면 그렇게 많은 라이트 리드 펀치를 냈다는 것은 당신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왜냐하면 라이트 펀치를 선제타로 내면 카운터에 오픈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그의 전략은 도대체 뭐였으며 그것에 놀라지 않으셨나요?
포먼: 그가 라이트 리드를 몇 개 냈는지 되새겨 보면요. 그가 12개를 던졌다고 하셨지만 제 느낌에는 한 150개쯤은 되었던 것 같아요. 하하. 아직도 그 펀치의 위력이 느껴집니다. 전 그때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복서를 과소평가 했던 거예요. 전 그가 어떤 공격을 해와도 결국에는 제가 그를 KO시킬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 펀치의 파워가 누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바닥에 눕게 되었죠.

리포터: 그리고 어떻게 되셨죠?
포먼: 정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헤비급 챔피언 벨트, 그것을 가지기 위해 전 정말 열심히 했었거든요. 그런데 (다운되고 나서)카운트가 원~ 투~ 하고 들려오는데, 제 인생이 다시 한 번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감에서 상실감으로의 변화였어요.

그는 다시 챔피언이 되는데 집착했다. 다시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년 3개월 동안 휴식을 취한 포먼은 76년 1월에 복귀전을 가졌다. 상대는 31승(24 KO) 3패 1무의 론 라일이었다. 라일은 포먼이 꼽는 가장 주먹이 셌던 세명의 상대 중 한명이었다(나머지 두 명은 제리 쿠니, 클리블랜드 윌리엄즈, 포먼은 그들의 펀치에 대해 커버를 해도 몸이 떨릴 정도라 평했다).

중범죄로 7년간 복역하면서 교도소에서 복싱을 배운 라일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는데, 포먼을 상대로도 라일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날카로운 공격을 계속 시도했다. 첫 라운드부터 포먼이 큰 것을 허용하면서 시작된 역대급 난타전, 이 이후의 전개는 아래의 영상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라일전에서의 승리 후 포먼은 프레이저와의 2차전에서 다시 한 번 KO승을 거두었고, 77년까지 세명의 상대를 더 때려 눕히면서 45승(42KO) 1패의 전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3월 17일, 알리와 대등하게 싸웠던 지미 영과의 명승부(1977년 올해의 경기)에서 판정패를 당한 조지 포먼은 갑작스럽게 링을 떠났다. 악역 이미지의 조지 포먼도 영영 사라졌다.

포먼은 영과의 경기가 끝나고 락커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고 죽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하며 다시 태어난 포먼은 1978년 목사가 되었다. 그 후로 10년 동안 그는 신을 위해 봉사했다. 거리와 교도소에서 설교를 했고 라디오를 통해 복음을 전파했다. 1980년에는 자신의 교회를 세웠다. 84년에는 지역사회의 비행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한 청소년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청소년 클럽의 운영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마이크 타이슨이 19세의 나이로 헤비급 챔피언이 된지 4개월이 지난 1987년 3월, 38세, 우리나이로 40세였던 조지 포먼이 갑작스럽게 링으로 돌아왔다. 포먼이 컴백한 첫째 이유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타이슨과 싸우고 싶어서였다.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한 목적이었다. 당시의 타이슨은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무적의 포스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38세의 포먼이 돌아와 모두가 두려워하는 마이크 타이슨과 싸우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목적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포먼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한 버트 슈거의 생각은 아래와 같다.

"그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어냈죠. 과거의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이미지를 걷어내고 따뜻하고 껴안고 싶은 곰 인형 같은 캐릭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컴백에 대해서는 미련하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10년이나 지난 1987년에 38살이 되어서 컴백을 한다는데, 그냥 조지를 위해 행운이나 빌어주어야겠다 싶었습니다."

주체육위원회는 포먼에게 까다로운 검사 자료를 요구했다. 너무나 예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체중인 부분이 문제가 되었지만 포먼은 결국 출전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고 87년 3월 9일 컴백전을 가졌다. 25승 11패의 전적을 가진 스티브 조우스키를 상대로 포먼은 4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미디어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는 너무 뚱뚱하고 느리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포먼은 승리를 거듭했다. 1990년 9월까지 그는 무려 21연승(20KO)의 막대한 전적을 쌓으면서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할 기회를 잡았다.

포먼은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너무 커지고 느려졌다. 원래 느리게 움직이던 스타일이라 기동력 부분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펀치 콤비네이션이 잘 듣지 않게 되었고 단발에 의존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에 미래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체력 부분에서 포먼은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더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에 포먼은 대해 긴장하지 않고 힘을 빼고 싸우는 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일격의 위력도 여전했다.

당시의 챔피언은 에반더 홀리필드였다. 크루저급에서 체급을 올려 타이슨과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던 홀리필드는 타이슨이 어이없이 더글라스에게 무너지는 바람에 더글라스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더글라스를 KO로 때려잡은 홀리필드는 1차방어전의 상대로 조지 포먼을 맞아들였다.


홀리필드는 하위 체급에서 올라온 선수답게 빠르고 정교하고 테크니컬했다. 풍부한 움직임과 히트 엔드 어웨이, 또 치고 달라붙는 전법을 훌륭하게 구사하며 공격에서도 성공적이었던 홀리필드가 포인트 면에서 우세를 점하며 판정승을 거두었고 포먼의 대권도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포먼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링에 올랐다. 그러나 1993년 41세의 나이로 토미 모리슨에게 판정패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끝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런데 94년 4월, 왼손잡이 마이클 무어러가 홀리필드에게 생애 두 번째 패배를 안기며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갑자기 포먼에게 타이틀 도전권이 주어졌다. 일각에서는 포먼의 도전자 자격에 의문을 제기 했지만 조지 포먼이라는 살아있는 전설에게 그 정도의 혜택은 과할 게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리고 비록 도전권이 주어진들 35승(30KO) 무패를 기록 중인 26세의 젊은 챔피언에게 45세의 포먼이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어러는 사상 최초의 왼손잡이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는 원래 오른손잡이였지만 왼손잡이 자세로 서서 오른손을 활용해 경기를 풀어나가는 매우 독특한 스타일을 경기에 적용시켰다. 라이트헤비급 출신으로 작은 체구에 움직임이 굉장히 빨랐기 때문에 크루저급에서 헤비급으로 올라가 스피드를 기반으로 싸우던 홀리필드에게 무어러는 대단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홀리필드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말려들어 판정패를 당했던 포먼이 더 빠르고 더 까다로운 스타일을 가진 무어러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역시 희박해 보였다.

경기가 시작될 무렵, 해설자 래리 머쳔트는 다음과 같은 멘트를 던졌다.

"지난주에 텍사스에 홍수가 났는데, 포먼은 자신의 노부모를 구출해서 안전한 대피소로 모셨죠. 오늘 그는 무어러라는 범람을 만났습니다. 과연 오늘 그는 고지대에 설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갈까요?"

두 선수의 대결은 상당히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싸움은 일반적으로 뒷손을 주고받는 강타, 단발의 공방이 되기 쉽다. 만약 본인이 오른손잡이이고 왼손잡이를 상대로 왼손 잽을 낸다 치면 상대는 나의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막거나 걷어내고 자신의 왼손으로 받아치려 하게 된다. 복싱에는 다양한 변초들이 있지만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전개다.

나의 왼손을 주고 상대의 왼손을 받는 것은 오른손잡이를 상대로 할 때나 왼손잡이를 상대로 할 때나 마찬가지지만 오른손잡이의 왼손은 앞손으로 파워가 그다지 강하지 않은 반면에 왼손잡이의 왼손은 뒷손으로 파워사이드이기 때문에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를 상대로 왼손잽을 주고 왼손잡이의 왼손카운터를 받는 것은 등가교환이 아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대의 오른손에 의해 자신의 왼손 궤적이 방해받고 차단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와 싸울 때 왼손을 내기는 정말 쉽지가 않다. 왼손잡이에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고 서로의 뒷손의 경우 상대 커버링의 빈틈으로 들어가는 각도가 나오기 때문에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대결에서는 일반적으로 뒷손을 위주로 한 공방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무어러는 오른손 잽을 내고 상대의 오른손 카운터를 흘리면서 오른손 훅의 연속기로 역카운터를 거는데 능숙한 선수였다. 오른손 잽과 오른손 훅, 상체움직임, 그리고 기동력이 무어러가 가진 승리의 레시피였던 셈. 포먼도 무어러의 게임을 정면에서 맞받았다. 포먼의 잽은, 사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과 용도의 잽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은 레프트 스트레이트라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전략병기였다.

포먼은 거리를 재고 상대를 견제할 목적으로 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쭉 뻗는 공격적인 레프트로 상대를 물러서게 만들었고 그틈을 이용해 거대한 궤적의 양훅과 어퍼컷을 난사했다. 아무래도 적중률이 떨어지는 라이트, 레프트훅에 비해 잽은 잘 먹히는 편이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포먼의 펀치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잽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두 선수는 보기 드문 앞손 공방을 벌였는데 무어러는 놀랍게도 포먼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계속 걸고 있었다.

무어러는 턱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챔피언 레벨의 경기에서 그는 한 번씩 다운을 허용하곤 했는데, 그런 무어러가 포먼을 상대로 상당히 용감한 싸움을 벌였던 것은 솔직히 불가사의한 일이다. 해설진이 무모하다고 지적할만큼 무어러는 포먼의 레인지 안에서 여러 차례 승부를 걸었다. 대부분의 격돌에서 무어러가 일방적으로 점수를 쓸어담았다. 9라운드 까지 채점은 대락 8:1정도로 무어러의 일방통행이었다. 그것은 마이클 무어러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포먼은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라이트를 터뜨릴 함정을 계속해서 파고 있었다. 왼손 잽에 오른손을 감추고 원투를 간간히 구사했던 것. 해설진들도 그것을 눈치 챘고 무어러의 코너맨 테디 아틀라스 역시 경기 후반 무렵 포먼이 오른손 일격을 셋업하고 있다며 조심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지만 무어러는 HBO의 특집방송에서 나레이터가 내 놓았던 멘트처럼 '챔피언 답게' 싸웠다. 이미 점수로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나 있던 상황이었고 그는 남은 3라운 내내 적당히 도망만 다니면 되었지만 무어러는 여전히 포먼의 정면에서 독침 같은 펀치를 쏘아대고 있었다.

그러던 10라운드 1분 35초, 레프트를 따라 숨겨저 나온 포먼의 라이트가 건조한 타격음을 내며 무어러의 안면에 적중되었다. 무어러는 사실 이것을 맞고 이미 그로기에 빠져 들었다. 포먼은 첫 공격에 무어러가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버텨낸 것을 보고 조금 더 낮은 각도로 원투를 다시 던져 무어러를 깊은 잠에 빠뜨렸다. 조지 포먼이 사상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으로 등극하던 순간이었다.

이 당시 포먼은 자신의 커다란 몸과 주체하지 못하는 식욕을 스스로 희화해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에딜슨 로드리게스전을 앞둔 기자회견장에서 그가 "상대는 저의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배꼽샷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라고 말해 좌중을 폭소하게 만든 에피소드라던지, 어린 시절 하도 가난해서 어머니가 햄버거 하나를 사서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빨리 집어 삼켰다는 어린 시절의 일화를 얘기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햄버거를 먹어치우는 먹방 같은 것이 대표적이었다(그는 아직까지도 치즈버거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40대에 들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고 45세에 다시 한 번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포먼의 인생 스토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강력한 영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이에 관한 포츈 매거진의 한 영상 인터뷰를 전한다.

포먼: 제 인생에 대해 가장 이상한 건 너무나 오래 전에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거의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처음은 거칠었죠. 꿈이 없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싱에서 성공을 했고 비즈니스에서도 성공적이었어요. 제 인생은 괜찮았습니다.

다니엘 로버츠(포츈의 기자겸 리포터): 조지 포먼은 휴스턴의 피프스 와드에서 태어났고 15살 때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당시 그는 뭘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그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도 보면 그가 직업 훈련소에서 길을 찾았다고 나와 있죠. 그는 어떤 직업이든 가지고 일하고 싶어하던 청년이었지만 무시무시한 싸움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싱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출구였어요.
포먼: 처음부터 제가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항상 큰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로버츠: 포먼은 최고의 복싱선수로 기억되는 선수는 아닙니다. 그는 강력한 펀쳐로 역사에 남았죠. 그의 경력 초반은 거듭되는 성공의 연속이었습니다. 19세 때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프로에서 40연승을 거두었으며 조 프레이저를 쓰러뜨리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포먼: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챔피언이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25살이었고 광고 모델 같은 게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죠. 오직 오른손으로 상대를 때려눕히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건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로버츠: 경력의 전반부, 포먼은 무시무시한 선수였고 어딘가 악당의 이미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87년 10년만에 복귀했을 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메디슨 에비뉴 (뉴욕, 혹은 세계 광고의 중심지)가 포먼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화나있고 무서운 이미지에서 밝게 웃음 짓는 캐릭터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어 냈어요.
포먼: 전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고 자신했어요. 그리고 메디슨 애비뉴에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도리토, 멕도널드, 펩시, 여러 광고에 출연했죠.

조지 포먼 주니어(아들): 아버지는 여러 가지 물건의 광고에 출연하셨습니다. 언제나 세일즈맨이셨죠.

포먼: (광고 장면)조지 한 대 들여 놓으세요. 제 생각엔 그가 뭘 좀 아는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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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먼: 광고계가 모두 저와 함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전 돈도 많이 벌고 친구도 많이 만들었어요. 광고모델로 일하던 당시는 정말 좋은 세월이었죠. 어린 시절, 휴스턴의 꼬마들은 모두 TV에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45세가 되어서도 전 여전히 그 꼬마였어요. 전 광고라면 뭐든지 출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제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조지, 넌 여러 회사들을 모두 부자로 만들어 주고 있는데, 니 제품을 팔아서 너도 부자가 되는 게 어떠냐?" 라고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과 조인트 벤쳐를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 제품을 만들었어요. 저는 제 이름까지 제품을 위해 사용했죠. 저는 처음에 제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내는 정말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조리과정에서 기름이 빠져 나왔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내부에는 여전히 육즙이 가득했습니다. 아내가 "조지 포먼의 기름기를 잔인하게 빼주는 그릴" 이라는 카피를 지어주며 저를 설득했습니다. 일이 잘 풀렸어요. 한 일억대쯤 팔았죠.

로버츠: 포먼은 45세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두 경기를 더 치른 후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즈니스 세계로의 전향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그릴 비즈니스가 있었고 미친 듯이 팔려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광고업체들도 포먼과 계약하고 싶어 했죠.
포먼 주니어: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한 가지 철학을 물려주셨습니다. 조지 에드워드 포먼이라는 저희들이 배지처럼 착용하고 있는 그 이름은 품질과 진실성과 신뢰를 의미하거든요.
포먼: 성공을 원하신다면요.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항상 웃어야 하고 겸손하셔야 해요.

로버츠: 조지 포먼이 비록 복싱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는 아니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누구도 그가 복싱계에 새로운 마케팅 기회를 몰고 왔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그는 광고계의 사람들과 협력해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 가능하고 팔수 있는 상품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그런 것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결국 그는 링 밖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포먼: 인생을 살다 보면 심하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다운을 당하기도 해요. 수많은 좌절을 겪게 되죠. 그렇지만 제가 링 위에서 배운 한 가지는 우리 모두 다시 일어나 주먹을 계속, 계속 휘둘러야 한다는 겁니다. 승리에 대해 너무 불안해 마세요. 주먹을 휘두르는데 집중하세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여러분들도 승리하실 겁니다.

포먼은 76승(68KO) 5패의 전적을 남기고 1997년 복싱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2003년 복싱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헌액되었다.

그는 5명의 아내에게서 12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아들은 다섯이고 이름이 모두 조지 포먼이다. 첫째는 조지 포먼 주니어, 둘째는 조지 포먼 3세, 셋째는 4세, 이런 식이다. 딸들 중 몇 명도 조지와 연관이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포먼은 그것이 가족의 징표이며 자식들이 언제나 서로 돕고 살게 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여전히 매주 20여건의 광고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 그의 아들들의 주 업무 중 하나가 조지 포먼 시니어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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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먼은 현재 만 66세다. 프레이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알리는 파킨슨씨 병이 깊어 언제 떠날지 모르는 몸이다. 하지만 그는 최근 온라인 주문 배달이 가능한 정육점 체인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휴스턴의 저택에서 살고 있는 그의 거대한 차고에는 클래식카와 슈퍼카로 가득 차있다.

포먼은 결국 타이슨과 싸우지 못했다. 그는 제이 레노 쇼에 출연해 타이슨이 돈 킹과 계약하면서 자신을 피했다고 주장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전성기의 타이슨 조차도 이기지 못할 단 한명의 선수가 있다면 그것은 포먼일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프레이저와 비슷한 형태의 경기 구조를 가지고 있던 타이슨이기에 포먼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포먼은 자신의 왼 주먹을 저지, 오른 주먹을 레프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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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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