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시리즈] 링 밖에서 '더 위대해진' 복서 조지 포먼(上)

이용수 2015. 7. 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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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조지 포먼은 자신의 이름을 딴 조리기구를 시장에 내 놓았다. 조지 포먼의 '기름을 잔인하게 빼주는 그릴'은 20달러에서 150달러 사이의 가격대로 판매되었는데, 포먼의 몫은 이익의 40%였다. 물건이 한창 잘 팔릴 때 포먼은 한 달에 450만 달러(약 50억원)를 벌었다. 1999년 포먼은 그릴의 제조사에 상표권을 넘겨주면서 1억 3700만 달러(약 1500억원, 2015년 인플레이션 환산 가치로는 약 2200억원)를 받았다. 그릴 사업을 통해 얻은 포먼의 누적수입은 2억 4천만 달러(약 2650억원) 가량이었다. 복싱에서 그가 거둔 총 수입의 3배 정도 되는 액수였다. 포먼의 그릴은 총 1억대가 넘게 팔렸다. 평균가를 70달러로 잡는다면 7조 7천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는 2004년 "마케팅의 세계 챔피언 조지 포먼"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조리기구 시장으로의 진출이라는 벤처에서 조지 포먼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통해 판매를 일으킬 수 있었던 왕성함과 성실함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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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릴을 이용한 조리 가이드를 여러 권 출판했고 전국을 돌며 출판 기념행사를 가졌다. 홈쇼핑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했고 또 방송에도 자주 나갔다. 아시아 시장의 공략을 위해 재키 챈과 제휴를 맺기도 했다. 그가 당시(7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계속) 현직 목사로서 주말은 교회에서 봉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강행군이 있었기에 포먼의 그릴은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블룸버그는 포먼에 대해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 태양 같은 미소, 호감을 이끌어내는 겸손함과 꾸밈없는 솔직함을 가진 사람이며 산타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졌다'는 인물평을 내 놓았다. 그의 그런 면모가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감을 준다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성실함과 긍정적인 이미지는, 그리고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는 세계적인 경제 매체에 까지 클린히트를 적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올드 복싱팬들이 기억하는 조지 포먼은 거대하고 무표정하고 사나웠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펀치를 휘둘렀던 인물 중 한명으로 손꼽히며 수많은 대 선수들에게 압도적인 재앙을 선물했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듯했고 악동 이미지를 풀풀 풍기던 젊은 조지 포먼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마케팅 세계 챔피언인 조지 포먼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1949년 미국에서 시작된다.

아직은 많은 흑인들이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조지 포먼의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흑인 복서들의 전형대로 그 역시 처참한 가난을 맛보며 거칠게 성장했다. 그의 동생 로이 포먼은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형과 저는 '가난'에 대해 잘 알죠. 하하. 보통 가난이라고 하면 뭔가 조금이라도 있잖아요? 근데 우리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가난 했어요. 가난 그 자체였죠."

포먼의 어린 시절 별명은 원숭이였다. 7남매 중 다섯째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투잡을 뛰었다. 당시 흑인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의 수준은 대단히 낮았다. 1960년대, 백인들이 100을 벌때 흑인들은 59를 벌었다. 그리고 같은 흑인이라도 남녀 간의 격차가 약 22% 가량 되었다. 때문에 아무리 일을 해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먹을 것은 마련해 오는 어머니 덕에 7남매는 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어린 포먼은 항상 모친을 걱정하며 언젠가 어머니가 편하게 살도록 꼭 성공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포먼의 전처 아드리앤 포먼은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어마어마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위해 못할 일은 없을거예요.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셨고요."

포먼의 고향인 피프스 워드(fifth ward)는 휴스턴에서 가장 험악한 지역이었다. 흔히 블러디 피프스라고 불렸을 정도다. 빈곤의 중심이자 폭력의 온상인 그곳에서 자라난 포먼은 미식 축구 스타인 짐 브라운을 동경했고 NFL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중학교 시절 미식축구 팀에서 뛰었던 그는 수업을 자주 빼먹고, 귓 골목의 위협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15세에 학교를 중퇴했다. 이 당시의 조지 포먼에 대해 사촌 린다 게일 윙고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조지는 싸움을 좋아했습니다.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와 그의 친구들은 어울려서 패싸움을 벌이곤 했죠. 조지와 친구들이 자신들에게 달려 들까봐 모두들 무서워했습니다."

포먼과 친구들은 술에 취해 빈집을 털고 행인들을 상대로 강도행각을 벌였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그를 경찰도 주목하고 있었다. 포먼 스스로는 이 시기에 대해 어떻게 밝혔을까.

"도둑질을 하고, 강도짓을 했습니다. 정말 깡패였어요. 고등학교에서 중퇴했고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이 시행한 빈곤퇴치 프로그램이 포먼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신설된 직업 훈련소에 들어갔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보장된다는 TV광고를 본 포먼과 그의 친구들이 즉각 입소신청을 했던 것.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함께 입소했던 친구 로이 해리슨은 훈련소의 첫인상에 대해 "깊은 숲속이었어요. 곰이나 사자 같은 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 우리에겐 전혀 새로운 모험이었어요. 엄청 흥분했었습니다(미소)" 라고 회상했다.

직업훈련소는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세 끼의 푸짐한 식사가 정시에 제공 되었으며 직업 훈련 뿐만 아니라 일반 교육의 기회도 제공되었는데, 포먼 일파는 그곳에서 상당히 잘 해냈다고 한다. 해리슨은 당시의 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뭘 배우면 다음 게 나오고 또 다음 게 나오고, 시험을 계속 치고 또 다음 게 나오고 뭐 그런거였어요. 공부가 이런 거구나 하고 그 때 알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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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그들은 본격적인 직업기술 과정을 위해 이동했다. 포먼과 해리슨은 전기 기술과정에 등록했다. 학과 과정에서 포먼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행동 통제 면에서는 아직 많이 불안정 했다. 그는 자주 싸움에 휘말렸고 결국 큰 싸움이 벌어져 퇴소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에게 기회를 준건 복싱 코치 독 브라더스였다. 그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소년들에게는 보통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포먼의 사이즈와 운동능력을 고려해 링에 세워 보기로 했던 것이다. 브라더스는 당시의 포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복서가 될 만큼 충분히 못생겼더만."

복싱이 포먼의 욱하는 성질을 바로잡았다. 그는 복싱을 통해 조금은 성숙한 사람이 되었고 직업훈련소를 2년 만에 졸업했다. 아직은 직업 복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취업을 할 작정이었다. 그의 귀환에 대해 그의 동생 로이 포먼은 "훈련원으로 떠날 때의 형은 원숭이였어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형은 '조지 포먼'이 되어서 돌아왔죠.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 하시면서도 현실을 생각하면서 걱정을 계속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고 직장을 잡지 못하면 언제든 원숭이로 되돌아갈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시의 사회상은 포먼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정부의 직업교육과 평등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젊고 커다란 흑인들에게 제대로 된 취업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절감은 포먼을 다시 거리로 내몰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브라더스가 포먼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포먼의 모친은 그래도 포먼을 생각해 주시는 분은 코치님 밖에 없다며 아들이 복싱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

브라더스는 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포먼을 출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먼은 올림픽 금메달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 브라더스는 각각 60년과 64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알리와 프레이저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금메달을 따면 어떤일이 일어나는지를 포먼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올림픽까지 불과 1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브라더스는 포먼을 끝내주는 선수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1968년과 그해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되었던 하계 올림픽은 미국 인권운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68년 4월에는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6월에는 인권운동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각각 암살되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월남전의 참전을 거부한 이후 옥고를 치르고 있던 중이었다. 블랙 판터를 위시한 과격 분리주의 조직들의 활동이 거세졌고 그들은 흑인 운동 선수들에게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행동을 통해 저항 전선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10월 16일, 멕시코 올림픽 200미터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의 존 카를로스는 시상식에서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들어 올리는 블랙 판터의 경례를 했다. 이것은 올림픽에서 금지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동으로 해석되어 두 선수는 즉시 올림픽 선수촌에서 퇴출되었다.

흑인 사회는 그러나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행동을 의거로 규정했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고 온 미국인들의 시선이 조지 포먼에게로 쏠렸다. 결승에 오른 그가 복싱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그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상대는 하필 냉전의 상대국이었던 러시아("당시 소련) 선수였다. 동생 로이 포먼이 "상대가 소련 선수니까, 조지가 그를 두들겨 패면 소련에서 미사일을 발사할까봐 무서웠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어딘가 첨예한 구석이 있던 대결이었다. 그리고 소련 대표 이오나스 체풀리스는 포먼에 비해 기교가 월등했다.

기교면에서 포먼의 펀치는 골치아프다. 어떤 트레이너도 자신의 선수가 포먼처럼 주먹을 휘두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복싱에서의 펀칭이란 적중률과 항상 수비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상대의 반격 가능성을 고려해서 내는 것이다. 큰 백스윙은 상대가 방어하기가 쉽고 팔로스루가 크면 상대의 카운터를 허용하기가 쉽다. 백스윙과 팔로스루가 파워를 끌어내는 주 요소지만 복싱에서는 그것을 얼마나 절제하면서 최대한의 파워를 끌어내느냐가 중요하다. 포먼의 펀치는 복싱보다는 거리의 것에 가까웠다. 백스윙을 아주 크게 가져가는 거대한 아크의 스윙이고 팔로스루도 깊었기 때문에 위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상대가 피하기가 쉽고 빗나갔을 때 카운터에 취약해진다는 점이었다.


체풀리스와의 결승전에서 포먼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체풀리스가 경기초반 카운터를 연이어 적중시키며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포먼은 그렇지만 맞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탱크처럼 밀어붙였다. 1라운드 중반부터 맷집과 근성이라는 자산이 무자비한 주먹 습성과 삼각편대를 이루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이 전개되었다. 분명 체풀리스가 많이 때리고는 있는데 포먼의 얼굴은 멀쩡했고 포먼의 펀치가 간간히 하나씩 적중될 때마다 체풀리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갔으며, 눈에 띄게 느려지고 제대로 반격을 못하면서 포먼의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가던 체풀리스는 레프리의 RSC선언에 의해 구조되었다.

온 미국의 시선이 조지 포먼에게로 쏠린 그 순간을 복싱 전문가 빌 캐플란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살의 조지 포먼, 아직 신인에 불과하던 그가 조그만 성조기를 꺼내 들더니 그것을 살짝 흔들고서는 사방으로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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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런 행동은 흑인 과격파 사이에서 맹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성조기를 흔드는 사진은 전국에 대서특필되었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여러 방송과 신문사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금메달을 어디든 목에 걸고 다녔는데 리본이 닳아서 새것으로 교체해야 될 정도였다. 일부 흑인들은 그를 '엉클 톰'이라고 모욕했지만 그가 보여준 평화의 제스차는 당시의 사회상황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린든 존슨은 포먼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포먼은 "상상도 못할 일이 계속 일어났던 거죠. 그가 바로 직업 훈련소의 아버지였습니다. 직업훈련소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전 정말 막장에서 구조된 거였거든요."라고 말했다.

1969년 조지 포먼은 프로무대로 진출했다. 그는 전 챔피언 소니 리스튼과 훈련을 함께 했고 리스튼이 가지고 있던 파워펀치와 강렬한 악당 이미지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6월 23일 포먼은 돈 월드헬름이라는 선수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졌다.


포먼의 펀치는 굉장히 자주 허공을 갈랐다. 포먼이 거의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 정도로 크게 헛스윙을 하는 그림도 나왔다. 상대는 작고 재빨랐다. 그렇지만 도망을 다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3라운드에 포먼의 펀치가 스치듯 걸리면서 움직일 수 없게된 월드헬름은, 이어지는 포먼의 일제 사격을 받은 후 비틀거리며 쓰러져 카운트 아웃이 될 때까지 파이팅 포즈를 취하지 못했다.

데뷔전의 8일 후, 포먼은 두 번째 경기를 가졌고 1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세 번째 경기는 13일 후였고 포먼은 또 다시 1라운드 KO승을 따냈다. 데뷔전부터 1970년 2월 16일까지의 약 8개월 사이에 포먼은 무려 16연승을 달렸다. 한 달에 약 2.3 경기를 뛰는 페이스였다. 그중 KO승은 13번(1라운드 KO 5회)이었고 포먼과의 경기에서 판정으로 살아남은 세 명은 모두 36전, 42전, 87전의 베테랑들이었다. 헤비급 선수가 이정도의 페이스로 경기를 뛴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알리는 첫 16전을 치를 때까지 약 25개월(2년 1개월)이 걸렸고 프레이저의 경우 21개월 (1년 9개월)이 걸렸다(타이슨의 경우 포먼과 상당히 근접한 페이스를 보였다. 그의 첫 16승은 약 10개월여 만에 달성되었다).

1970년 3월 31일부터 72년 10월 10일까지 포먼은 21경기 연속 KO승을 거두었다. 이 기간 동안 포먼이 KO승을 거두는데 사용한 평균 라운드 수는 3.85로, 상대들이 대부분 4라운드 정도 버티고 쓰러진 셈이다.

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무하마드 알리는 1964년에 소니 리스튼을 눕히고 챔피언이 되었다. 65년부터 67년까지 알리는 9차 방어를 달성했지만 병역거부로 67년 3월부터 70년 10월까지 까지 약 3년 7개월간 링을 떠나게 된다. 알리가 떠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 WBA는 8인 토너먼트를 열었다. 우승자였던 지미 엘리스가 WBA 타이틀을 가져갔고 64년 동경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조 프레이저와 엘리스가 양대 기구 통합 타이틀을 놓고 격돌했다. 당시 24승 무패 21KO를 기록 중이던 프레이저는 엘리스를 5라운드 KO로 잠재우며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1971년, 프레이저는 복귀한 알리의 도전을 받았다. 프레이저의 2차 방어전이었다. 세기의 대결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두 선수는 역사적인 명승부를 펼쳤다. 알리의 아웃복싱은 예술의 경지에 올라있었지만 작고 재빠르며 순식간에 파고들어 레프트 강타를 상하단으로 뿌려대는 프레이저의 스와머 스타일은 알리에게 굉장한 어려움을 안겼다. 전반적으로 프레이저의 미묘한 우위로 진행되던 경기는 15라운드에 프레이저가 알리에게 다운을 뺏아내면서 승부가 갈렸다. 프레이저가 알리에게 생애 첫 패배을 안기며 타이틀을 수성한 것이다.

1972년 5월까지 두 명의 도전자를 추가로 KO로 물리친 프레이저 앞에 조지 포먼이 나타났다. 프레이저의 전적은 29전 29승(25KO)이었고, 포먼은 37전 37승(34KO)였다. 포먼은 당시 24세, 프레이저는 29세였다. 경기는 1973년 1월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분위기는 포먼이 프레이저의 왼손 훅 앞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대부분의 스포츠 기자들은 그냥 농담 같은 매치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최고의 복싱 역사가였던 고 버트 슈거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이유는 말입니다. 프레이저가 알리를 꺾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무패였죠. 당시 사람들은 다소 마구잡이로 펀치를 휘두르고 스냅이 없는 어린 포먼이 프레이저를 이길 리가 없다고 본거죠."


하지만 경기의 초반부터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프레이저의 스타일은 상하좌우의 상체 움직임으로 상대의 펀치를 흘리면서 접근해, 왼손 훅을 위주로 바디와 안면을 공격하는 스타일이다. 포먼은 프레이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사각으로 빠져나갔다가 카운터를 치는 테크닉을 구사하려고 하면 길고 굵은 팔로 프레이저의 몸통을 감아 슬쩍 돌려버렸고, 숙이면서 접근할 때는 가차없이 라이트 어퍼컷을 휘둘렀다. 그보다 더 문제는 압력의 행사 부분에서 나왔다.

단신의 프레이저는 머리를 흔들며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키가 작은 것이 오히려 유리해지는 접근전에서 위력을 발휘하는데, 따라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프레이저가 접근해 오면 물러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리는 물러나면서도 예리한 잽과 죽창같은 스트레이트, 정교한 어퍼컷 등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렇지만 포먼은 환상적인 상체움직임으로 소나기 사이를 달리며 알리를 추격해 강타를 계속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포먼은 상대가 누구건 간에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이 점이 프레이저의 공격 리듬과 레인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펀치가 적중되어도 꿈쩍도 않는 내구력 역시 프레이저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1라운드의 중반, 상체를 숙이는 더킹 모션을 취하던 프레이저의 안면에 포먼의 라이트 어퍼가 적중되면서 첫 다운이 나왔다. 이 순간 당시 중계진의 캐스터였던 하워드 카우셀은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라고 세 번 크게 외쳤다. 이 어구는 미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언더독이 거함을 침몰시키는 상황이라면 종목을 불문하고 자주 사용되고 있다.

프레이저는 1라운드에만 세 번의 다운을 당했고 2라운드에도 세 번의 다운을 더 당했다. 레프리는 2라운드 2분 26초에 포먼의 TKO승을 선언했다. 포먼의 첫 타이틀 획득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반전 드라마였고 너무나 압도적인 내용이었다. 포먼은 그렇지만 프레이저와의 첫 경기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일전이었다고 추억했다. 1990년 그가 자니 카슨 쇼에서 출연해 털어놓은 프레이저 전의 후일담을 들어보자.

카슨: 6월 20일 경기 당일 체중은 어느 정도로 나갈 예정입니까?

포먼: 저는 큰 게 좋아요. 체중 감량을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링 위에서 제일 큰 사람이면 좋겠고 상대가 저를 무서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굳이 감량을 하겠어요? 그건 사자보고 집고양이와 싸워하니까 몸무게를 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카슨: 하하하!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포먼: 저는 크게 나갈 겁니다. 몸을 작게 만들어서 싸우고 싶지 않아요. 마이크 타이슨은 작고 빠르죠. 하지만 저는 크고 훨씬 강하게 때립니다.

카슨: 덩치가 큰 것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포먼: 그렇죠.

카슨: 그럼 지금까지 당신이 싸워온 상대 중에 당신을 겁먹게 만든 선수가 있었나요? 솔직히요.
포먼: 아...

카슨: 예를 들면 알리?
포먼: 희한하게도 알리와 싸울 때는 무섭지 않았어요. 비록 제가 타이틀을 잃기는 했지만 그가 무섭지는 않았죠. 그런데 조 프레이저는, 제가 아는 가장 터프한 사람이었거든요. 총구에서 연기를 뿜는 조 프레이저 말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프레이저의 경기를 보시고는 "어찌나 세게 때리는지 맞은 사람 몸이 반대편으로 휙 돌아가더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죠. 저는 챔피언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 프레이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했습니다(관객들 큰 웃음). 그리고 드디어 그와 링 위에 단 둘이 남게 되었어요. 조 프레이저와 싸울 때가 된 거죠. 근데 제가 그를 때리면 그가 기뻐했고(카슨: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고들 하죠?) 제가 헛스윙을 하면 화를 내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또 저는 경기 전에 눈싸움으로 기를 죽이려고 하거든요. 눈싸움을 하다가 상대가 눈을 떨구면 제가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근데 그날은 프레이저가 눈을 떨구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제 무릎이 떨리고 있었거든요. 그가 제 무릎이 떨리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했어요.

카슨: 눈싸움은 파이터들에게 꽤 중요하죠?
포먼: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프레이저와의 눈싸움은 정말 시작도 하기 싫더라고요.

카슨: 이제 누구와 싸우신다고요? 이름이 익숙하지는 않은 선수였는데..
포먼: 에딜슨 로드리게스입니다.

카슨: 좋은 파이터인가요?
포먼: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관객, 사회자: 큰웃음).

또 다른 인터뷰에서 포먼은 프레이저의 레프트 훅에 대해 '피융~' 하고 총소리 같은 게 났다며 혀를 내둘렀다. 반면에 프레이저는 "힘이 너무 세고 너무 크고 튼튼하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라는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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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에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된 포먼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 1500달러(현재 환산 가치로 약 1200만원 정도)를 손에 쥐어보는 것이 꿈이었던 포먼은 챔피언이 되고 나서 어머니에게 집을 사드렸고 동생 로이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새끼 호랑이 같은 고가의 애완동물을 수천달러를 지불해가며 구입했고 미녀들과 어울렸으며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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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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