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선 저가 생필품 쓸어담고 주유소 앞에 긴 줄

신지후 입력 2015. 6. 30. 20:17 수정 2015. 6. 3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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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 공포에 휩싸인 그리스

휘발유 구입 한명당 20유로 제한

은행에 자금·연금 맡겨 놓은 은퇴자

"병원·생활비 없어" 문 앞에서 호소

"5년 긴축에 미소 사라진지 오래"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맞은 그리스 국민들이 극심한 혼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물가가 폭등할 것에 대비해 사재기에 뛰어드는가 하면, 영업을 중단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게 되자 당장 병원비를 마련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29일 생필품과 연료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그리스 전역에 절망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테네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저가 식료품을 쓸어 담던 스탈로 메스타나는 WP에 "정서적, 경제적으로 전쟁을 겪고 있는 기분"이라며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남부 하니아에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방겔리스 콧소스는 가디언에 "주유소 절반 가까이에서 이미 휘발유가 다 떨어졌다"며 "불안해하는 관광객과 주민들이 기름을 채우러 주유소로 몰리면서 혼란스러운 장면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영국 방송 채널4에 따르면 그리스 내 다수 주유소들은 고객 한 명당 20유로(약 2만5,000원)어치 이상 휘발유를 사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전날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은행 영업중단과 예금인출 제한 조치를 발표하자 은행으로 달려가 밤을 새운 이들도 많다. 특히 정기적인 수익이 없고 은행에 맡겨둔 은퇴 자금과 연금이 전부인 사람들은 닫힌 은행 문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얼마 전 비서직에서 은퇴한 아테네 주민 조지아는 "몸이 아파 지난달 입원했던 터라 병원비를 내려면 현금이 필요하다"며 "당장 이번 주 생활을 위한 자금도 얼마 없다"고 말했다. 은퇴한 남편과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메스티나도 "상식적으로는 유로존에 남는 게 맞는 선택이겠지만 더 이상 짜낼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절망스러워했다.

그나마 현금이 남아 있다는 현금입출금기(ATM)에 기대를 걸고 있는 주민들은 하루 출금한도가 1계좌당 60유로로 제한된 데 대해 반발하고 있다. 아테네 중심가에 위치한 ATM 앞에서 길게 줄 서고 있던 스타브로스 마라구다키스는 "오랜 시간 줄을 서봤자 가져갈 수 있는 돈은 얼마 없다"며 "이렇게 오랫동안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빨리 죽음을 맞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은행에 이어 ATM에서까지 돈을 인출하지 못한 부모들은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기 잔돈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지난 5년 간 혹독한 긴축정책에 시달려 온 그리스 국민들 가운데는 이미 디폴트 상황에 대해 자포자기한 이들이 적지 않다. 아테네에서 조명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소피아 트레주는 "경제위기가 수년간 이어지며 갖고 있던 예금 계좌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며 "그래서 은행 폐쇄나 현금 부족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절망과 공포가 절정에 달했지만 그리스 정부와 유럽연합(EU)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국제채권단의 개혁안을 거부하더라도 그리스 정부가 그렉시트를 막고자 모든 법적인 권리를 다 동원할 것"이라며 국민들이 개혁안에 반대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EU 정상들은 반대표는 유로존 회원국 지위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며, 개혁안이 부결되면 그렉시트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브느와 꾀레 유럽중앙은행(ECB) 집행이사는 29일 프랑스 일간 레 제코와 인터뷰를 통해 "유로존에서의 그리스 탈퇴는 지금까지는 이론적 문제였지만 불행히도 더 이상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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