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칼럼] 연애를 허하라

2015. 6. 3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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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최근 '데이트 폭력'과 여성 혐오 건으로 주변이 떠들썩하다. 평등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창해온 좌파 진영에서는 데이트 관계에서 폭력이 오간 일로 문제가 되고 있고, 지난 10여년 동안 '재미'를 빙자하여 여성 혐오를 묵인해온 한 온라인 사이트는 '게릴라'들의 공략을 당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남녀의 전쟁이 가장 오래된 전쟁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다.

데이트 폭력 사건으로 좌파 동네에서는 다행히 자성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말다툼할 때 팔 등을 잡고 말하는 습관이 실은 상당히 위협적이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폭력적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는 간증을 들으며 역시 역사는 말을 통한 계몽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변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녀관계는 마치 인종차별 사회에서 흑백 간의 연애,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과 시종의 관계와 같아서 권력적 위치에 있는 이는 미처 알아차리기 어려운 영역이 존재한다. 이번 사건도 권력을 가진 자의 무심함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기득권을 일정하게 포기하고 자신의 행동을 낯설게 보는 민감성을 키워내지 않으면 연애가 지속되기 어려운 것인데 그 점을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나마 남자 여자가 직접 부딪치면서 배워갈 수 있는 경우는 다행스런 경우라 할 것이다. 여성을 성기로 부르면서 낄낄대고 "퇴근하고 왔는데 여편네가 밥은 안 해놓고……" "오늘 밥상 엎는다. ㅆㅃ" 등 일상의 짜증을 공유하면서 남성들 간에 일체감을 느끼고 여성 혐오를 키워가는 동네가 생겨서 염려스럽던 터였다. 이들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여성상-맞벌이와 육아와 살림을 잘하고 자기 부모에게도 효도하는 착하고 가정적인-을 만들어놓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모든 여성들을 '김치녀'라고 부르면서 연애불가능성을 부추겨 왔는데 이 동네에 소년들의 출입이 잦아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걱정을 하던 터였다.

그런 동네에 일이 터졌다. 메갈리안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한 사이트에서 여성 혐오적 글의 주어와 목적어를 바꾼 글을 게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퇴근하고 왔는데 남편 ○이 밥은 안 해놓고……" "남편×이 지금 밥 안 한답니다……. 굶으란 건지" "이렇게 사회생활을 못 해본 고추들은……" 등의 글을 올리고 남자의 성기를 표현하는 단어를 추임새처럼 사용함으로써 그간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한 자신들의 여성 혐오 행위를 자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대를 넘어서는 세상을 원하는 이들에게 메갈리안들은 최근 큰 인기를 누린 영화 <매드맥스>의 주인공 퓨리오사처럼 일시적이나마 대단한 통쾌감을 선물해 주었다.

어느 때보다 이성에게 끌리는 청년기에 여성을 적대시하는 언동을 부추기는 이런 현상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구마시로 도루는 사다리를 걷어차인 세대, 곧 취직 빙하기 시대를 사는 세대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고 부르면서 이들은 여자를 '신 포도'로 생각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연애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자신감을 잃은 청년들은 "여자는 변변치 못하다"거나 "걸레 같다"라는 식으로 욕하면서 이솝우화 <여우와 신 포도>에 나오는 여우처럼 손이 닿지 않는 포도는 시어서 먹지 못하는 것이라면서 자기중심적 합리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 같이 병신짓'이나 하면서 살기에 인생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페미니스트들은 애초부터 데이트 비용은 분담하고 결혼할 때면 형편껏 함께 집을 마련하자고 제안해왔다.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연애를 허하라"는 운동이 벌어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좀 다른 맥락에서 다시 그 슬로건을 펼칠 때가 온 것 같다. 연애는 의자 뺏기의 놀이가 아니다. 싱싱하게 연애를 하고 싶다면 나무를 올라갈 사다리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용기 있고 기품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삶의 기획이 가능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여성(들)과 함께 연애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나게 연애하는 것, 어려울까?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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