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죽음을 대하는 두 정치인의 '너무 다른' 자세

최고운 기자 2015. 6. 30.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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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저녁, 미국 남부의 유서 깊은 흑인교회에 스무 살을 갓 넘긴 백인 남성이 난입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로 알려진 이 남성의 손에는 45구경 권총이 들려있었습니다. 남성이 난사한 총에 평화롭게 성경공부를 하던 흑인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와 허술한 총기 규제가 불러온 참사였습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흑인들의 장례식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미국의 인종문제를 되짚는 추도사를 해 나가던 오바마 대통령. 많은 분들이 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막바지가 되자 오바마 대통령이 잠시 침묵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말로 '놀라운 은총'이라 해석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읊조리는가 싶더니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첫 소절을 부릅니다.

▶ 흑인 목사 영결식에 간 오바마…감동의 추모노래

첫 소절이 시작되자, 단상에 있던 교계 인사들은 박수를 치며 일어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장례식 참석자들도 모두 일어나 찬송을 함께 부르죠. 오바마 대통령은 중간에 희생된 흑인 9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들이 은총을 발견했다고 위로합니다.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참 익숙한 곡입니다. 영국 성공회 존 뉴턴 신부가 흑인 노예무역에 관여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면서 지난 1772년에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한 때는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모든 죄를 사해준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백파이프 오르간으로 자주 연주되는 이 찬송가는 오히려 영국보다 미국인에게 더 애창되는데요,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명이 대거 희생됐을 때, 사망자들을 애도하는 곡으로 쓰였고요. 9.11 테러 희생자 추모 행사에서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백인에게 희생된 흑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이 부르는 치유와 사랑의 노래. 백 마디 말보다 더 따뜻하게 유족의 아픈 가슴을 보듬었고,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자, 이제 그럼 우리나라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온 나라가 월드컵 4강 진출로 들썩이던 13년 전 이맘 때. 북한의 경비정 중형 1척과 대형 1척이 연평도 서쪽 해상 NLL을 넘어 왔습니다.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출동했지만, 북한은 참수리 357호를 향해 선제공격을 했죠. 인근에 있던 초계함 등이 가세하면서 승리하긴 했지만 참수리 357호에 타고 있던 윤영하 소령을 포함해 모두 6명의 승조원이 전사했습니다.

당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이어지는 교전 수칙이 큰 논란이 됐습니다. 용어가 좀 생소하죠. 일단 북한 함정이 NLL을 침범했을 때 경고 방송을 먼저 하고 그래도 돌아가지 않으면 사정거리를 두고 따라 붙고요, 이후 북한 함정이 더 내려오지 못하도록 바짝 붙어서 밀어냅니다. 그리고 나서야 경고 사격, 격파 사격에 들어간다는 건데요, 참수리 357호가 이 수칙을 지키려다 큰 피해를 입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이후에는 3단계, 즉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교전 수칙이 개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야속한 세월이 또 지나고 지나 어제(29일) 경기도 평택 해군2함대에서는 추모식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스러져 간 서해 영웅들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인데요, 이제는 동판으로 남은 아들의 얼굴을 매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가족들의 모습에 주변도 숙연해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추모식에 앞서 한 정치인이 여섯 용사의 희생을 '개죽음'이라 표현했습니다. 새누리당 김태호 의원입니다. 문제의 발언은 추모식보다 앞서 평택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장에서 나왔는데요, 공교롭게도 새누리당 지도부는 회의를 마치고 제2연평해전 추모식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었습니다.

"

그저 어머님, 어머님 외치며 죽어간 우리 아들들, 참 기가 찬 일입니다. 정말 이런 일 있으면 사자처럼 용맹하게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잘못 건드리면 백배 천 배 더 응분의 대가를 각오해야 할 정도로 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우리 아들딸들이 이런 개죽음 당하는 일 없어야 합니다. 말로는 평화를 위해, 조국을 위해 이야기하지만 나라가 제대로 뒷받침 못하면 나라도 아닙니다."

발언은 곧 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야당은 '고귀한 희생을 막말로 폄하'했다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장병들의 죽음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아무런 보람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즉각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개죽음' 발언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문제가 되자 김태호 최고위원은 페이스북에 해명 글을 올렸습니다. '전사자들의 너무나도 안타까운 고귀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표현이었다.'라는 게 해명의 요지입니다. 당시 정부에서 교전 수칙이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아 군인들이 안타깝게 죽어갔다는 걸 격하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거죠.

또, 자신은 결코 전사자들을 모독하고 유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위한 의도로 그 발언을 한 게 아니라면서 오히려 전사자들을 제대로 예우해 주지 않은 당시 권력자들의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는데요, 네티즌들의 반응은 갈렸습니다.

당시 전사자들을 '전사'가 아닌 '공무상 사망자'로 처리하고 유가족에게는 3천만 원만 지급했다는 점을 들며 김태호 의원을 이해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아무리 안타까운 희생에 격분했다 하더라도 희생 당사자에겐 모독이, 유가족들의 가슴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막말' 수준의 발언은 문제가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태호 의원이 순직한 소방관 영결식장에서 (지지자의 부탁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가 사과를 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다며, 신중하지 못한 언행을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전에서 '개죽음'을 찾아보니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옵니다. 여섯 용사의 죽음이 아무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일이 될 수 없겠죠. 김태호 의원도 그런 뜻에서 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런 뜻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만큼은 경솔하다는 비판을 받기 충분합니다. 여섯 용사의 희생에 대한 당시 정부의 대우를 문제 삼고, 유가족을 위로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한 마디의 말이 들어맞지 않으면 천 마디의 말을 더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기에 중심이 되는 한 마디를 삼가서 해야 한다. 중심을 찌르지 못하는 말일진대 차라리 입 밖에 내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채근담의 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입니다.최고운 기자 gowoo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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