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가 밭을 간다는 나라에서

이수지 2015. 6. 2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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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동유럽 여행 2] 우크라이나 키예프, 여행에의 기대

[오마이뉴스 이수지 기자]

 키예프의 성소피아대성당. 페체르스크 라브라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Dustin Burnett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김태희만큼 예쁜 여자들이 밭을 간다는 시시하고 오래된 농담 정도다. 키예프? 인도 맥그로드간지 카페에 앉아 항공기를 검색하기 전까지 '키예프'라는 도시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키예프는 지금의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공간이다. 이게 다, 세계 지리와 역사에 대한 나의 절대적 무식함 덕분이다.

호스텔에서 지도 한 장을 받아들고 시내로 나섰다. 머리는 여전히 백지인 상태로. 사실 우크라이나가 어쨌건 키예프에 어떤 볼거리가 있건 상관없다. 나는 다시 단순한 아이가 되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만으로 설렐 수 있었던 어린 시절처럼, 어디가 됐든 유럽 땅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새롭고 만족스럽다. 성인이 되어 여행을 하는 이유가 이런 거 아니겠나. 다시 아이의 마음을 갖는 것. 풍선 하나로 반나절을 즐거이 보낼 수 있었던, 작고 단순한 것들이 기쁨이 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설렘과 삶에 대한 흥분, 영감을 다시 느끼는 것. 키예프는 나를 아이이게 했다. 여기는 하늘의 구름도 좀 웃기게 생긴 것 같다. 한 줄로 촘촘하게 걸어가는 땅바닥의 개미 군단마저 흥미롭다.

키예프의 마트는 쾌적하고 깨끗했다. 인도를 돌아다니느라 5개월간 구경도 못 한 치즈가 냉장고에 가득했다. 점심에 들른 카페테리아 식당에서는 싸고 맛있는 보르쉬(바트 뿌리를 넣고 끓인 우크라이나식 수프)와 바레니키(동유럽식 만두)를 팔았다. 그리고 세상에! 해가 쨍한 점심시간에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생맥주를 마신다. 백지였던 내 머릿속에 키예프에 대한 지식 하나가 쌓였다. 이곳 사람들은 맥주를 즐긴다. 마음에 든다.

 키예프 시내. 우크라이나가 어쨌건 키예프에 어떤 볼거리가 있건 상관없다. 나는 다시 단순한 아이가 되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만으로 설렐 수 있었던 어린 시절처럼, 어디가 됐든 유럽 땅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새롭고 만족스럽다.
ⓒ Dustin Burnett
다음 날. 도시는 여전히 조용하다. 거주자 지역인 호스텔 주위엔 재미없고 우울한 소련식 콘크리트 건물이 즐비하다. 1991년까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던 키예프의 흔적이다.

심심한 도시의 색은 시내 중심가로 갈 수록 화려해진다. 구소련보다는 동유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파랗고 높은 하늘 아래로, 민트색, 황금색의 성당 지붕들이 휘핑크림 모양으로 부드럽게 묻어나 있다.

페체르스카야 수도원으로 갔다. 우크라이나 정방 교회 소속인 이 수도원은 황금색 지붕으로 장식된 웅장한 건축물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볼거리는, 교회 건물들 아래 숨은 지하 동굴에 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얇고 노란 촛불을 들고 좁은 미로 길을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어둠 속으로 성가대의 은은한 찬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김태희가 밭을 간다는 시시하고 오래된 농담이 번뜩 떠오르는 젊고 예쁜 여자의 뒤를 쫓았다. 촛불을 들고 정숙하게 미로를 따르던 여자가 유리관에 키스하고 기도를 올렸다. 유리관 안에는 관이 하나 들어있다.

8~9세기. 동슬라브 민족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 키예프 공화국)가 키예프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키예프 루시가 동방정교회를 공식 종교로 채택한 1051년, 그리스 성자 안토니는 그를 따르는 페오도시와 함께 지금의 페체르스카야 수도원 자리에 동굴을 팠다. 개미굴처럼 여러 개의 동굴이 이어진 서늘한 지하. 성 안토니와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판 이 동굴에서 예배를 올리고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그리고 죽었다. 그리고 천 년이 흘렀다.

성 안토니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직 이 동굴 속에 있다. 귀신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교회 안에 그의 영이 깃들어 있다거나 하는 얘기도 아니다. 그의 죽은 몸이 이곳에 있다. 우크라이나 김태희가 키스를 한 관 속에 누워있는 자. 그자가 바로 천 년 전에 죽은 성 안토니오다.

지하 동굴은 기온이 서늘하고 공기가 건조하다. 지상에 겨울이 가고 다시 여름이 찾아오기를 천 번 반복되는 동안, 몽골,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키예프를 지배하고 거쳐 간 동안, 소련이 등장하고 붕괴한 그 오랜 세월 동안, 지하 동굴은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로 죽은 성자의 몸을 감싸며 자연적인 미라를 만들어냈다. 그 미라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키예프 사람들은 대낮부터 생맥주를 마신다. 슈퍼마켓에서는 어린 돼지를 통째로 얼려서 판다. 소시지는 케첩 대신 체리 소스에 찍어 먹는다. 그리고, 키예프에는 천 년 된 미라가 지하 동굴에 누워있다. 이보다 더 신비하고 이국적일 수 있는가? 아. 키예프가, 삶이, 흥미롭다.

 생맥주 노점상. 키예프에서는 해가 쨍한 점심시간에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생맥주를 마신다.
ⓒ 이수지
 키예프의 점심시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김밥천국 꼴인 '푸자타 하타 (빨간 간판)'으로 향한다.
ⓒ 이수지
여행은 인생을 변화시킨다?

변했다고? 내가? 비행기가 데려다준 낯선 세계를 거치며 변했다고? 고모가 목소리 좀 듣자며 어깨를 흔들던 어린 시절의 수줍음은 아직 내 안에 남아있다. 서른이 다 되었지만 난 아직 행동에 책임지고 실수에 대해 사과하는 데 서툴다. 어리숙하고, 미성숙하다. 5개월간의 인도 여행이 내게 준 건 변화라기보다는, 찌질한 나 자신의 발견이었다. 인도에서 발견한 나라는 여자는 기대 이하였다. 참을성 없고 배려도 부족하며 쪼잔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이다. 고집, 아니 근거 없는 아집이 매우 강하다. 후회하는 일이 잦은데, 그 후회란 늘 타인(특히 남편)에 대한 원망과 책임 전가로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참을성은 없는 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한마디로 좀 별로다.

근데 이건 좀 너무 실망스러운 거 아닌가? 여행에서 얻은 게 '새로운 나'가 아닌 구질구질한 나 자신에 대한 처절하고 구체적인 발견 따위라니. 여행이라는 게 좀 변해보자고 하는 거 아닌가. 나 별로인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낯선 땅으로 가서 낯선 음식을 먹고 낯선 공기로 호흡하며 낯선 말을 내뱉고 나면 좀 달라질까 싶어서. 달라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인 척이라도 해보려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면 전혀 나 같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며 새롭게 시작해 볼 수도 있으니까.

인정하겠다. 내가 인도 여행에 건 기대는 꽤 컸다. 순진하게도 난, 인도 여행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줄 거라 믿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잖은가. 인도에서 우연히 만난 수염 긴 구루의 가르침을 받아 내면의 평화를 얻었다거나, 학교에 가는 대신 거리에서 포스트 카드를 파는 어린 소녀가 불쌍해 구호단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거나. 학업을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뭐…. 컴퓨터 공학에서 히브리어로 전공을 바꿨다거나.

안타깝게도, 내 인생은 통째로 바뀌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다. 쪼잔하고 이기적이고 고집 센 나 그대로다. 콜카타로, 델리로, 히말라야로 떠나든, 정작 중심에 선 찌질하고 지루한 나 자신은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인도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왔다고 한들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남극으로, 달나라로 간다 한들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이제는 인정할 때다. 안타깝게도,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여행 같은 건 없다. 여행 후 끝내 달라지지 못한 내가 아쉬워서, 관광지 이름이 새겨진 컵이라든가 라벤더 향기가 나는 부채 따위의, 한 달 후 중학교 시절 편지들과 함께 서랍 안 골동품이 되어버릴 여행 기념품이나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블라디미르 대성당.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제가 이 성당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 이수지
 키예프 시내. 이제 기대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땅을 밟았다고, 동유럽을 여행한다고, 인생이 바뀌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이수지
이제 기대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땅을 밟았다고, 동유럽을 여행한다고, 인생이 바뀌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행 후 남는 게 관광지 이름이 새겨진 컵뿐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그저, 기대가 너무 컸던 거다. 여행이 인생을 바꿔주진 못하지만, 일상은 바꿔준다. 오늘도 봐라. 지하철 타고 회사에 갔다가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가는 일상에서, 버냉키를 안주 삼아 낮부터 공원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지하 동굴로 가서 천 년 된 미라를 보는 일상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애초에 여행은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말 자체를 잘못 이해한 거다. 한 번의 여행이 인생을, 나를, 180도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행의 낯설고 이상한 일상들은 분명, 나를 변화시킨다. 나 자신을 당장에 개조하고 싶은 내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아주 천천히, 조금씩, 알아채지 못하게 변한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분명 변했다. 낯가림은 있어도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떠들어 댈 때도 있는 게 지금의 나다. 사과하는 데는 서툴지만, 내가 사과하는데 서툰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건 변화다. 잦은 후회와 자기연민은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나의 어리숙함이라는 것도 안다. 열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렇게 다르다. 여행 때문만은 아니다. 더스틴. 엄마. 친구. 배고픔. 울면서 본 영화. 숙취. 서류 배달 알바를 하다 비를 쫄딱 맞고 길거리에서 터뜨린 울음. 9.11 테러. 가방 분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전화한 후 목소리만 듣고 바로 끊어버린 기억. 할머니의 죽음. 빨간 셀로판 지를 대면 단어의 의미가 가려지던 영어단어집. 수업 땡땡이. 2m 담 넘기. 밀란 쿤데라. 삼겹살. 100m 달리기 22초 돌파. 길에서 주운 5000원. 수박의 단맛. 크고 사소한 것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소화되어, 조금씩의 변화를 배설해냈다. 그러니까,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반드시 여행을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삼겹살 한 점도 인생을 아주 조금은,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다만, 여행이 불러오는 변화는 각도가 조금 더 다양하다.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에헴!) '생각'은 기대하지 않은 사건과 조우할 때에 발생하는 거라고. 여행은 기대하지 않은 사건, 우연의 연속이다. 여행은 세상을 낯설게 한다. 낯선 세상, 여행이 불러오는 우연 앞에 마주한 나는 생각한다. 이 낯선 세상에 대해. 낯선 세상 위에 선 나에 대해. 낯선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고 이상한 음식을 먹는 이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일상과는 방향과 폭이 조금씩 다른 그 생각들이 축적되어, 나는 변화한다. 낯설었던 세계는 낯설지 않게 되고, 낯선 세상과 조우하며 내 안에 스며든 생각들은 이제, 조금의 변화가 되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마트에서 스파게티 면과 토마토소스, 치즈를 샀다. 호스텔로 돌아가 오랜만에 소박한 요리를 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부엌에 달린 큰 창으로 햇살이 비쳤다. 저녁 아홉 신데, 아직 날이 훤하다. 키예프의 여름은 저녁 아홉 시에도 해를 떨구지 않는구나.

 호스텔로 돌아가 아주 오랜만에 소박한 요리를 했다. 근데, 가방은 좀 벗지그래?
ⓒ 이수지
 키예프 시내를 장식한 시위 현수막.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당선된 여당 후보의 부정 선거 증거가 드러났다. 분노한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행동했고, 대통령 재선거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냈다.
ⓒ 이수지
겉모습은 수줍고 조용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열정적이고 젊은 나라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시, 당선된 여당 후보의 부정 선거 증거가 드러났다. 분노한 우크라이나의 시민들은 행동했다.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키예프 시내를 오렌지 물결로 가득 채운 우크라이나의 시위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에는 헌법까지 개정시키며 대통령 재선거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냈다.

우크라이나. 저녁 9시를 밝히는 긴 해처럼, 에너지가 강한 젊은 나라다. 낯선 세계다. 인도의 낯섦과는 각도가 다른 낯섦이다. 설레지만, 기대하지 않겠다. 조금씩 다른 각도의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크라이나가, 그리고 이어질 동유럽 여행이 던져줄 우연과 낯섦을 맞닥뜨려보겠다. 삼겹살 한 점 정도의 변화는 불러오지 않을까?

뭐, 아니면 말고.

 오렌지 혁명을 이끈 우크라이나의 잔다르크 율리아 티모셰코. 오렌지 혁명으로 권력을 잃었던 친 러시아계 성향 야누코비치가 다시 정권을 잡은 후, 그녀에 대한 전방위 수사가 이루어졌다.
ⓒ 이수지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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