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의 순간이 지난 뒤 친구로 남을 수 있는가

입력 2015. 5. 30. 16:20 수정 2015. 5. 3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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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

(17) H 이야기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성적 긴장감이 팽팽해지는 상대가 있다. 평소에 별다른 느낌이 없다가 강렬한 긴장의 순간을 맞닥뜨릴 때도 있다.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한 느낌으로.

H를 만난 것은 J를 통해서였다. 20대 중반을 막 넘어서던 시절이었다. 파리 유학 생활 1년차부터 친하게 지내던 J의 소개로 햇살이 쏟아지는 6월의 어느 날 만났다. 영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로 대학원 과정을 파리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학교를 선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만남의 첫 번째 이유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각자 애인이 있었다. 그는 학교 문제로 영국에서 파리로 종종 들렀고 우리는 몇 차례 어울렸다. 정오 무렵에 만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카페에 들렀다. 그러다 보면 저녁 시간이 되었고 함께 식사를 했고 또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밤이 되었다. 서로 만나려 애쓴 적은 없었는데, 막상 만나게 되면 헤어지기 힘든 상대. 지루하고 무료한 나날이면 그가 나타났다. 하루쯤 낭비해 버리고 싶은 날을 보내기 좋은, 어쩐지 위안이 되는 사람.

오가는 대화의 내용은 흥미진진했다. 아마 그 때문에 그와의 만남을 쉽게 끝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좌충우돌식 연애담과 적나라한 남성의 심리 묘사는 내 귀를 발기하듯 곤두세웠다. 영화와 문학, 예술을 넘나드는 허세 없는 박식함은 덤이었다. 자기풍자적 유머감각도 좋았다. 나는 그의 자기복제식 연애담을 살랑살랑 핥듯이 놀려대곤 했다. 그는 카페에서든 공원에서든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접근했다. 당시 유럽에서 수줍다고 평판이 난 동양 남자에 대한 선입견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의 시도는 상당한 성공률을 자랑했는데, 그에게 성취의 단맛을 안겨주는 여성 대부분이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점은 의외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시작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관계에 대한 그의 불평은 끊임없었다. 애교 섞인 푸념에 가까운 편이었다고 해도.

우리에게 섹스는 축복이었을까

그와의 연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적도 있었다. 그를 만날 때면 나는 주로 잘 풀리지 않는 연애로 지쳐 있거나 사랑에 빠졌으나 쉽게 다가가지 못해 가슴앓이를 할 무렵이었다. H와는 마음만 먹으면 넘나들 수 있을 듯한 관계를 왜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는 진전시킬 수 없는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당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섹스와 유혹은 혼자만 이미 빠져버린 사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기 쉽다고. 은밀히 마음을 빼앗긴 상대 앞에서 나는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어쩔 줄 몰라 도망가거나 가까스로 잡은 기회도 엉뚱한 행동으로 망쳐놓고는 했다. 내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상대방은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느껴졌다. 미궁 속 길을 잃고 헤매는 나는 내게조차 매력적이지 않았다. 자신감을 잃으니 나를 드러내는 일보다는 숨기기에 급급했다. 혼자 하는 사랑의 미망에 사로잡히기 전에 유혹을 시작했어야 했다. 사랑은 유혹과 함께 길을 찾고 몸과 함께 깊어지는 편이 좋았다. 물론, 동시에 벼락 맞듯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만, 이는 운명에 감사해야 할 영역이었다.

대체로, 유혹과 섹스에는 유희적 측면이 있다. 봄바람처럼 살랑일 수 있는 여유 없이 뜨거운 열기로만 이루어지기 힘들다. 각기 다른 두 존재가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배려와 협상이 필요하다. 내 감정에 눈이 멀수록 판단력을 상실하고 관계는 시작도 전에 내 무게로 비틀거린다. 이는 지나친 방어나 섣부른 공격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상대방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져야 할 유혹은 더더욱 불가능한 과제가 된다. 절박하면 할수록 쉽지 않아지는 것들에 관해 H와 나는 종종 한탄했다. 가끔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의아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연인이 되지 못할까. 우리에게는 충분한 유혹의 순간들과 적당한 거리감이 있었으나 결정적 타이밍을 붙잡을 만한 의욕이나 동기가 없었다. 이성과의 만남이 이만큼 좋았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이미 만족하고 있었다.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균형이 귀하고 소중한 관계였다. 섹스의 가능성은 우리 사이를 구름처럼 떠돌았지만, 축복 같은 비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한다. 과연 우리에게 섹스는 축복이었을까. 우리는 서로가 섹스를 매우 좋아하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섹스를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아주 까다로운 상대라는 것도 알았다. 구두를 좋아하는 사람 중 최대한 많은 구두를 충동적으로 사들이는 이도 있겠지만, 착용감과 디자인, 첫 만남에서의 느낌까지 면밀하게 고려해서 신중히 구입을 결정하는 이도 있다. 마음에 드는 구두는 몇 켤레 사재기하기도 한다. 오래오래 신기 위해서다.

J의 소개로 만난 그 남자 H내 귀를 발기하듯 곤두세운좌충우돌 연애담과 박식함하지만 연인이 되진 않았는데…쾌보다 고통이 계속 커진다면우정의 미덕은 사라져버린다짧게 허물어지는 연애보다때로는 긴 우정이 더 좋다네

어느 초겨울, 우리 사이의 나른함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출렁이는 순간을 맞았다. 한동안 느슨했던 사이를 다시 묶어준 것은 비통하게도 J의 죽음이었다. 다시 만났고 J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가 채워졌고, 불현듯 우리를 둘러싼 낯익은 파리의 풍경도, 서로의 존재도 달라 보이는 시간에 이르렀다.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말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단 한 번도 상대를 거부하고 싶거나 불편하게 느낀 적이 없었음을. 아마도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만으로 위무가 될 수 있는 상대임을. 그럼에도 또 다른 명확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20대는 이미 수차례 정념에 휩쓸렸지만 너무나 손쉽게 벗어났음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것처럼. 폐쇄된 공간의 팽창하는 열기와 같이 아찔했다가 빠져나온 뒤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쏟아짐의 순간을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찾아오는 멀미를 서로를 통해 느끼고 싶지 않았다. 허탈함의 멀미를. 그럼에도 돌아서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그날 밤을 함께 지냈다. 자정을 넘긴 이후에도 차마 헤어질 수 없어 곳곳의 술집을 전전했다. 걷다 지쳐 나중에는 그가 끌고 온 자전거 뒷자리에 몸을 실었다. 앞에 놓여 있는 그의 등이 생각보다 높고 커다랬다. 그가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파리의 풍경들이 낯선 속도로 지나갔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뺨에 흩어지고 고요한 주변 풍경에 빠른 리듬이 솟아났다. 울퉁불퉁한 길 덕분에 우리의 몸은 또 다른 리듬으로 흔들렸다. 좌석 뒤를 잡고 있는 두 손에 매달린 내 몸의 균형이 아슬아슬해졌다. 나는 그와 사랑을 나누는 대신, 파리의 골목길들과 반응했다. 그것은 은밀하면서도 때로는 직접적인 통증을 수반했다. 내 시선 속 흩어지는 파리의 새벽 풍경은 꿈처럼 아득했다. 상점들은 어두운 밤 속 잠든 듯 웅크려 들어 있고 거리를 지나치는 이들의 그림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어슴푸레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길 저편을 지나가는 고독한 발걸음 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우리를 둘러싼 밤을 가르는 소리는 자전거 페달이 돌아가는 소리, 바퀴가 지면 위를 불규칙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 혹은 가볍게 차오르는 그와 나의 숨소리뿐이었다. 낯익은 골목길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그들은 기이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아왔다.

그와의 산책은 이후에도 즐거웠다

남녀 간의 우정이란 약간의 불안정한 상태가 존재의 매력인 경우도 있다. 사랑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듯 우정도 그에 마땅한 노력이 필요하다. 남녀 간의 우정을 사랑에 못 미치는 단계로 폄하할 이유는 없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관계란 끊임없는 협상이 필요하고 그래야 건강하다. 정념의 순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느냐고? 섹스 이후 연인이 될 수 있는지도 물어야 하는 세상에서 왜 친구가 될 가능성에는 더 까다로워야 하는가? 지나간 정념 이후 찾아오는 평온함을 누리지 않고 외면할 이유는 없다. 한때 유혹의 찰나가 오갔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혹이 거절당했다고 해서 당신이 매력 없는 존재는 아니다. 다만,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당신에게 필요할 뿐이다. 쉬운 사람과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매력에 마침 반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정중한 유혹의 제안을 마땅한 예의로 거절할 수 있는 겸손도 있어야 한다. 인연의 소중함에 감사하게 되면 우리는 배려를 통해 새롭고 고유한 사이로 맺어질 수 있다. 내가 H와 맺은 관계가 그러했다. 외롭고 허전한 나날 속 그의 존재는 위로가 되었다. 그와의 산책은 이후에도 즐거웠다. 우리는 정념이 지나간 자리의 넉넉함을 튼튼하게 누렸다.

다만, 언젠가 맺어질 사랑을 위해 현재의 우정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감내하는 관계라면 권장하고 싶지 않다. 나른한 기다림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다. 쾌보다 고통이 더 커지는 편이 한쪽으로만 지속된다면 우정의 미덕은 사라진다. 나의 경우는 쾌와 고통의 균형으로 사랑과 우정을 구분한다. 균형의 흔들림이 나를 긴장하게 하고 기꺼이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가깝다. 쾌와 고통의 균형이 애초에 중요하고 평안함의 미덕에 더 사로잡힌다면 우정을 맺기에 알맞은 순간이다. 그런 면에서 H는 적절한 우정의 인연이었다. 나는 그와 연인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때로는 짧게 허물어질 수 있는 연애보다 긴 우정이 더 좋다.

이서희

▶이서희

결혼 전이나 후나 다른 남자(그리고 여자)가 많이 궁금한 여자. <관능적인 삶>이란 책의 저자. 법학도의 탈을 쓰고 영화와 인문학 주변을 맴돌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와 마음껏 놀았다. 결혼 후 미국에서 12년째 살고 있고, 장차 나와 당신을 함께 발견하고 이해하는 어른들의 학습놀이 공간 '유혹의 학교'를 열고픈 꿈을 갖고 있다. 지면으로 먼저 시작하는 '유혹의 학교'는 격주 연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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