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위안부 할머니 "일본 사과 없이 눈 못 감아"

오종우 2015. 5. 3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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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한(恨) 많은 세상을 등지고 떠나셨다. 향년 91세 고 이효순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라는 여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치욕과 고통의 삶을 이제야 접은 것이다. 죽음으로써야 아픈 기억을 끊어낸 할머니 마음은 이제라도 가벼워지셨을까? 하지만 남아있는 우리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이효순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 지난 1941년, 하얀 피부와 곱게 땋은 머리, 꽃다운 17살 소녀 이효순은 아침을 먹고 동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평온한 여느 때처럼.

하지만 갑자기 차를 끌고 나타난 일본인들에 순박한 소녀의 삶은 철저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같이 빨래를 하던 다른 여성 3명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할머니는 지난 2013년 병상에서 주사를 맞으면서도 어렵게 인터뷰에 응했다.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일본 사람이라"

(옷은) "사복 입었어.

(몇 명이?) "열두 명"

(차는 가져왔어요?) "응"

그때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오시는 어머니 모습을 봤지만, 차를 멈출 수 없었다.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 모습. 그렇게 가족과 집, 고향과 속절없이 멀어져갔다.

"엄마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던가 저기서 오는데 만나지도 못하고...엄마는 엄마대로...나는 나대로 가면서 울었어.

가만히...잠시라도...당시 이효순 소녀가 느꼈을 공포와 막막함을 생각해 본다.

17살, 지금으로 치면 고1 여고생, 친구들과 평소와 같이 도랑 가에서 웃으며 빨래를 하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낯선 일본 남자들에게 납치된다…….

"네 명이 끌려갔는데 한 여자는 뛰어내렸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어요?) "몰랐지"

(부산가서는 뭐라 그래요?) "일본 간다고"

(뭘 하러 간다고 그래요?) "그런 소리는 하나도 안 했어"

조선 처녀의 상징과 같은 곱게 땋은 머리는 부산항으로 가는 길에 강제로 잘려 단발로 바뀌었다. 또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대만으로 떠날 때는 옷과 신발까지 모두 일본식 복장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집에선 난리…"우리 딸 어디로 갔노?"

지난 27일 숨진 위안부 이효순 할머니 빈소엔 동생 이차순(80)<가명>할머니가 쓸쓸히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6살이던 이차순 할머니는 어머니가 우는 것만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집에서는 전쟁이, 난리가 났죠.", "엄마가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아침에 딸을 빼앗긴 어머니와 가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무렵 고 이효순 할머니의 오빠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숨을 거뒀다고 한다.

"집에 오니까 아버지가 딸도 그렇게 보내고 아들도 징용 보내고 병이 나서 아파 있다가...내가 오고 난 이후 1년 지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어려운 무자비한 일들이 일제 강점기 벌어진 것이다.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딸, 누나, 언니가 낯선 사람에 갑자기 납치돼 사라진 것이다. 나라마저 빼앗겨 어디에 하소연할 수조차 없었던 가족, 특히 가장인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떠올리기 싫은 고통의 기억…"차마 묻지도 못했다"

이효순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차에 태워져 부산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동남아 6개 나라로 끌려갔다. 대만, 홍콩,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멀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까지.

그리고 성에 굶주린 일본 제국주의 군인들에게 처절하게 삶이 망가졌다.

가족들도, 주위에서도 할머니 아픈 과거를 감히 묻지 않았다.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어떻게 물어요. 근데 언니가 많이 울었어요. 밤에. (나이 들어서도) 술 마시면 가만히 누워 많이 울었어요."

"언니가 말을 아꼈지만 일본 군인에 당했던 얘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잠을 재우지 않으려고 물을 담은 항아리를 머리 위에 올리게 하고 또 졸면 바늘로 몸을 계속 찔렀다고."

아마도 일본 군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자, 어린 소녀를 유린하기 위해 고문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세월조차 이제 물을 수 없다. 이효순 할머니가 그 모든 상처를 안고 영영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집에도 갈 수 없었던 위안부

전쟁이 끝나고 이효순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여성들과 함께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를 태운 배는 대만에서 다른 대만 출신 위안부 여성들을 내려주고, 할머니가 처음 떠났던 부산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향인 경남 의령으로 바로 가질 못했다. 아니 스스로 가지 않은 것이다.

"위안부 3명이 돌아왔는데 집으로 부끄러워서 가지 못했어요. 부산에서 위안부로 함께 들어온 여성과 함께 머물렀어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데리러 찾아왔어요."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4년 동안 고통의 위안부 생활을 한 뒤, 집에도 마음대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것이 수년 동안 동남아 각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할머니의 당시 억울한 처지였다.

이효순 할머니는 우여곡절 끝에 38살이 돼서야 결혼도 했지만, 위안부로 망가진 몸 때문인지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 없다. 그리고 말년을 동생의 집 근처에서, 또 병원 병실에서 쓸쓸히 어렵게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위안부 생활 자체로 망가졌고, 또 귀국 뒤에도 아픈 기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해 고통의 연속이었다.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단 52명뿐

이효순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38분 가운데 이제 52분만 남았다. 그나마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연세가 90을 넘겨 고령이다. 이제 할머니들이 그토록 바라는 일본의 사과를 받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꽃다운 청춘, 아니 삶 전체를 잔인하게 빼앗긴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의 진정어린 사과 한마다 듣지 못하고 응어리진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일본은 내심 위안부 할머니들이 어서 사라지길 바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역사 왜곡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왜놈들한테 사과를 받아야 눈을 감지"

경남 통영에 있는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김 할머니는 22살에 끌려가 '후미코'란 일본이름으로 중국에서 3년, 필리핀에서 4년 끔찍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억지로 버티며 해방 뒤 찾아온 고향에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모 혼자 계시고 어머니 어디 갔냐고 하니까 어머니 세상 떠나고 동생은 끌려갔다고. 이것 참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눈물밖에 안 나왔어요. 어머니 사진을 봐도 눈물이 안 났어요. 원통해서 눈물도 안 흘렸어요. 왜 내가 곡을 안 했냐면 울 자격이 못 되어서요. 어머니 세상 떠나실 적에 (임종도 못 했는데)…."

70년 전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김 할머니는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일본이 참 독한 것들이거든. 이번에는 한 번 어떻게 해서든지 사과를 받을 것인데….

바라는 것은 왜놈들한테 항복을 받아서 눈을 감는 것, (사과를) 안 받으면 눈을 못 감겠고 그런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런 김 할머니도 이제 97살의 나이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정부 차원의 개입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위안부'

김복득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세상에 알리고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지난 2013년 초 자신의 일대기를 책으로 내기도 했다.

제목은 바로 <나를 잊지 마세요>!

평생의 상처를 다시 끄집어낸 건 바로 후세들에게 아픈 역사를 절대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다. 다시는 우리와 같은 아픈 상처를 입지 말라고...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구술 증언과 피해 등을 모아 '백서'로 만들어

오는 2017년까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했다.

뒤늦었지만 하루빨리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을 제대로 집대성해야 한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가 절대 감춰지고 왜곡되지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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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9] 사과도 못 받고…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또 별세

오종우기자 (helpbell@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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