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파탄난 부부관계, 잘잘못만 따질 것인가

이범준 기자 2015. 5. 3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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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송이혼은 상대방의 책임을 따져묻는 ‘유책주의’ 재판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잘못을 까발리며 재판은 진흙탕이 된다. 그래서 부부관계 파탄 여부로 결정하는 ‘파탄주의’ 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마침내 대법원이 파탄주의 이혼으로 변경할지에 대한 공개변론을 연다.
백영수씨(가명)는 1976년에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결혼 20년째인 1996년 다른 여자를 알게 됐고 1998년에는 그 여자와 사이에 딸 아이도 낳았다. 그러면서도 본처가 낳은 아이들의 학비를 내고 생활비를 보냈다. 그러다 2011년 무렵 신장에 병을 얻어 성인인 본처의 자녀들에게 신장이식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1996년에 만난 여자가 여전히 자신을 돌봐주고 있고, 이번에야말로 관계를 정리하겠다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장기적으로 상속문제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구가정법원은 이혼청구를 기각했다. 본처와의 결혼생활이 파탄난 것은 맞지만 잘못이 백씨에게 있으니 이혼청구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도 마찬가지 결론이었다. 백씨는 대법원에까지 상고했다.

대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오는 6월 26일 공개변론을 열고,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겠다고 했다. 대법원이 이혼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을 여는 것은 처음이다. 당사자는 물론 법조계에서는 대한민국의 이혼 시스템이 확 달라질 수 있다며 긴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혼 시스템은 백씨의 소송판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수도 있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이혼제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이렇게 행복한 노년을 맞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상보다 가혹하다. 6월 26일 대법원에서 공개변론이 열리는 이혼사건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 이혼제도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 이상훈 선임기자

파탄 책임 누가 있는지 밝혀야 이혼 허가기본적으로 두 남녀가 결혼하려면 시·구청 또는 읍·면사무소를 찾아가 신고서를 적어서 제출하면 된다. 당연하게도 판사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이혼은 판사의 손을 거쳐야 한다. 부부 두 사람이 이혼 조건을 완벽히 합의한 경우에도 가정법원을 찾아가 이혼하겠다고 제 입으로 또렷하게 말해야 한다. 결혼에서 주례가 성혼선언을 한다면, 이혼에서는 판사가 파혼선언을 한다. 법률적으로도 이런 시스템은 특이한 것이다. 법무법인 민의 주두수 변호사는 “이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계약도 자율적인 해지를 하는 데 판사의 허락을 받지는 않는다. 또 가족관계를 해소하면서 판사의 확인을 받는 유일한 절차가 이혼이다. 심지어 입양을 해소하는 파양에서도 판사 확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다양한 설이 있지만, 결혼관계에서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라는 게 가장 유력하다. 여성은 여러 면에서 약자이므로 부당하게 이혼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국가가 감시하고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소간의 절차가 있기는 해도 협의이혼은 원칙적으로 두 사람이 합의하면 끝이다. 성인 두 사람의 인생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지는 않는다. 왜 이혼하는지, 재결합 가능성은 없는지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는다. 왜 이혼하는지는 두 사람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테고, 법복 입었다고 참견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이혼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다. 이때는 가정법원에 이혼재판을 청구해서 이혼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판사가 잘잘못을 따진다. 인생에 개입을 한다. 그러면 판사는 어떤 경우에 이혼을 허가할까. 법무법인 윈 이인철 변호사의 설명이다. “민법 840조에는 판사가 이혼을 허가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사유를 만들어놨다(그래픽 참조). 공통점은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이혼하려는 원인을 따지고 따져서 상대방이 원인이라고 밝혀내야 이혼을 시켜준다.”

재판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이때부터 상대방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까발리며 재판은 전쟁터가 된다. 이혼을 제기한 사람이라면 소송에서 이기려고, 소송을 당한 사람은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결혼생활이 이 지경이 된 잘못이 모조리 저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로펌 고우 고윤기 변호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소송이 시작된 이유가 한 사람은 이혼을 원해서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아서다. 그리고 원고가 이혼하기 위해서나 피고가 이혼을 막기 위해서나 방법은 상대방의 책임으로 모는 것이다. 사실 가사재판이라는 게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래서 판사들도 다른 민사재판과 달리 당사자를 직접 나오라고 한다. 그러면 서로가 정말 별의별 소리를 다 한다. 그야말로 아귀다툼을 한다. 뭐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저게 무슨 이혼사유인가 싶은 것까지 기억해내서 비난한다. 명절에 설거지 안한 것을 가지고 부모까지 연결해 비난하고, 쓰레기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이혼이 되어도, 안 되어도 문제라고 한다. 이혼이 안 되더라도 재결합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혹독하게 비난한 사람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혼이 되어도 문제다. 저런 사람을 만난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면서 자기비하가 시작된다.

이렇게 상대방의 책임을 따져묻는 재판 방식을 법률가들은 ‘유책주의’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책임이 적은 사람의 의사대로 이혼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소송당한 사람이 상대방의 책임이 크다고 입증하면 이혼은 되지 않는다. 실제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1981년 혼인한 김철수씨(가명) 부부는 1989년부터 별거했다. 1990년부터는 주소지도 옮겼고 17년간 연락하지 않았다. 2007년 김씨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대법원은 기각했다. “두 사람의 혼인관계가 파탄난 것은 맞다. 잘못을 따져보니 남편이 더 크다. 남편만 이혼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이혼청구 기각.” 이영자씨(가명)는 결혼생활 10년째에 집을 나갔다. 남편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경찰을 부르고, 감방에 넣어달라며 고소도 했다. 당연히 성관계도 결혼 5년째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이 이혼해주지 않아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서울가정법원은 기각했다. “주요한 책임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고 집을 나가버린 부인에게 있다”는 이유였다.

이혼을 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과 사는 경우 아이까지 낳아도 혼인신고가 안 된다. 흔히 말하는 사실혼이기는 해도 이중혼이기 때문에 법률의 보호를 못 받는다. 그래서 수십년 전에 파탄난 관계를 억지로 유지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법무법인 강호 장진영 변호사의 설명이다. “5~6년씩 별거해서 애정도 없고 사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기도 힘든 관계인데 이혼이 안 된다. 재산을 나눠주기 싫어서나 사회적 명성에 흠이 생길까봐 버티는 경우도 있다. 국가는 가정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이라지만 오히려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제약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결과적으로 사회통합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학자들과 법률가들 사이에서 부부관계가 파탄인지만 확인해서 그렇다면 이혼하게 해주라는 요구가 많다. 이른바 ‘파탄주의’ 이혼재판이다. 이혼 이외에 나머지 부부생활 잘못에 대한 책임은 정신적 손해배상인 위자료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파탄주의 핵심은 ‘파탄의 기준’지금이라도 파탄주의로 전환하는 게 가능한 것은 민법 840조 6호 때문이다.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6호를 해석하면서 유책주의인 1~5호의 연장선으로 봤다.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전제로, 기타 이혼 사유가 있으면 가능했다. 파탄주의로 가려면 6호를 달리 해석해서 파탄만 인정되면 이혼이 되는 조항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대법원이 아주 가끔씩 파탄만으로도 이혼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별적으로 심각한 사례의 경우 구제해줬다. 이러다 보니 하급심 가정법원에서도 이혼기준이 제각각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임채웅 변호사의 설명. “가사재판은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사연이 다양하다 보니 판사들이 계량화를 싫어한다.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 나도 가정법원 판사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루 아침에 파탄주의로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법무법인 한결 조숙현 변호사는 유책주의의 문제점이 있지만 그래도 세대간 차이를 고려하자고 말한다. “현재 결혼한 부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50~60대 여성을 보자.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가정을 꾸려 왔다. 그런데 파탄주의 이혼을 적용받으면 어떻게 되겠나. 위자료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재산분할도 완벽하지 않다. 퇴직금은 분할이 가능해졌지만 여전히 의사·변호사·교수 같은 자격의 가치는 평가되지 않는다. 젊은 세대와는 살아온 길이 다르고 처해진 환경이 다르다.” 이와 함께 파탄주의 이혼으로 바뀔 경우 진흙탕 싸움 같은 이혼소송이 사라질지에 대해서도 예상이 엇갈린다. 어차피 위자료 재판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이혼이 정해진 상황에서 많아야 3000만원을 두고 극단적인 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서울 양재동 서울가정법원 주변의 변호사들 사이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이혼소송에는 패소가 없다.” 소송을 내고 또 내면 상대가 지쳐서 협의이혼을 해준다는 것이다. 상대가 버티는 경우에는 반대로 본인이 지쳐 재산을 포기해서라도 이혼한다고 한다. 소송을 시작한 부부들이 현실적으로 다시 살기는 여간해선 어렵다고 한다. 이번 취재에 응한 변호사와 판사 10여명 가운데도 유책주의가 지금처럼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없었다. 법원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 기준을 봐도 파탄주의는 불가피하다. 오히려 파탄 기준이 중요하다. 별거 1년인지 5년인지 정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 수천만원에 불과한 이혼 위자료를 높여야 한다. 이런 것들이 가정과 자녀와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지, 강제로 묶어서 사회가 보호되는 게 아니다.”

6월 26일 백씨의 이혼 소송에 대한 공개변론은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의 대결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파탄주의를 채택할지, 그 기준은 무엇일지에 대한 결론은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전에는 나온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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