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밀유출 땐 처벌 감수"..공공기관, 청소노동자에 '무서운 각서'

2015. 5.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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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정원 지침 그대로 "국가안전보장에 위해…" 단서조항

국립국악원 등 과도한 서약서 요구

김포공항쪽은 '절대복종' 각서도

노동자들 "범인 취급 받는 것 같아"

노조 "강력한 표현으로 책임 전가"

언론재단 "보안취약 감사 지적 따른것"

'청소 업무 중 알게 된 일체의 내용이 직무상 기밀 사항임을 인정한다 … 국가안전보장 및 국가이익에 위해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여… 기밀 누설 시에는 어떠한 처벌 및 불이익도 감수한다.'

청소노동자 조아무개(66)씨는 지난달 이런 내용의 '보안서약서'(사진)를 받아 들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가정보원 청소노동자가 쓸 법한 보안 서약서를 요구한 곳은 서울 프레스센터 건물에 입주해 있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에게 건네진 '각서'에는 '직무상 기밀' '누설' '국가안전보장' '국가이익' '처벌·불이익·책임' 등 거창한 단어들이 즐비했다. 청소 용역업체인 ㅈ사는 청소노동자들한테서 이 각서에 서명을 받은 뒤 언론진흥재단에 전달하려 했지만, 조씨와 동료 4명은 서명을 거부하기로 했다.

조씨는 28일 "내가 마치 국정원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30년 청소일을 하는 동안 문제가 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범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각서만 봐서는 도대체 내가 뭘 조심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라고 하니 괜한 트집을 잡힐까봐 서명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공공기관들이 청소 용역업체에 고용된 청소노동자들에게까지 과도한 수준의 보안서약서를 요구해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 부처 및 산하 기관들의 보안업무를 기획·조정하는 국가정보원의 '국가 정보보안 기본지침'(기본지침)에 따른 것인데, 보안감사에 걸리지 않으려는 기관들이 일률적으로 서약서를 받다 보니 기관의 특성과 직무에 맞지 않는 무리한 각서가 등장한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보안서약서는 '기본지침'이 정한 서약서 내용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 누설해선 안 되는 기밀의 범위를 '일체의 업무'라는 식으로 모호하고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반면 청소노동자가 져야 하는 책임은 '어떠한 처벌 및 불이익'이라는 식으로 사실상 무한대다.

이에 대해 언론진흥재단은 "3년 전 문화체육관광부의 보안감사에서 보안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때부터 직원뿐만 아니라 건물에 상시 출입하는 청소노동자들에게도 보안 서약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어 "양식은 정부의 공공기관 표준양식을 참조해서 만들었는데 표현이 다소 과격한 측면이 있다면 수정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국정원 기본지침에 따라 보안감사를 하는데, 보안서약서는 기본지침의 기준 가운데 하나다. 모든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 이 지침에 따라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보안서약서를 받는다"고 했다.

다른 공공기관들도 청소·경비·시설 등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에게 비슷한 보안 각서를 받고 있다. 지난 2월 국립국악원도 비슷한 양식의 보안 각서를 용역업체 노동자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근무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국악원에서 지득한 제반 비밀 및 보안에 관한 사항을 일체 누설하지 않는다. 누설 시에는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관계 법규에 따라 어떠한 처벌도 받을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판소리 등 전통예술을 보존·계승·공연하는 국립국악원에서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기밀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때문에 정부 기관의 정보 보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기밀에 접근하기 어려운 청소노동자에게 과도한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면피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하해성 공공운수노조 조직부장(노무사)은 "정보 보안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 책임을 해당 업무를 하는 공무원들의 정보 처리 문제가 아닌 하도급 노동자의 부주의로 떠넘길 빌미를 만들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형태의 각서는 여러 사업장에서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권을 제한하는 손쉬운 수단으로 이용된다. '절대', '일체의' 같은 모호하고 강력한 표현이 주로 쓰이는 특성이 있다. 하 조직부장은 "강력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엄포를 놓는 용도로 쓰이는 경우도 흔하다. 내용 역시 회사의 방침에 무조건 따르라는 식으로 심각한 노동권 침해를 담고 있다"고 했다.

회사에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각서도 있다. 지난 3월 김포공항 기내 청소 하도급업체가 청소노동자들에게 건넸다가 노동자들의 반발로 철회된 각서에는 '작업 지시, 전근, 전입, 전출 등 회사의 명령에 대하여 이의 없이 따르겠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또 '3일 이상 무단결근하거나 기타 사규를 위반하면 회사의 조처에 이의 없이 따르고, 이 서약원으로 사직원을 대신하겠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법으로 정해진 사직 절차 없이 미리 써둔 서약서로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각서는 이미 있는 문구에 서명만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지지만, 노동자 본인의 의사 표시라는 의미를 가진 문서인 만큼 노동분쟁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여지가 많다. 노동자들의 권익 주장이나 문제 제기를 사전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곳곳에서 남용되고 있다"고 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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