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헤드폰과 USB 들고 디제잉하러 간다

2015. 5. 2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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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렉트로닉 페스티벌, 클럽 문화 확산되며

디제잉 배우는 일반인 증가

장비 발전으로 입문 쉬워져

지금은 없어진 서울 여의도 아이에프시(IFC)몰 지하 '엠펍'에서 1일 디제이를 몇번 한 적이 있다. 주제를 정하고 2시간 동안 음악을 트는 게 임무였다. '여름밤, 알코올을 부르는 노래'라는 주제를 잡고, 비치보이스의 '서핀 유에스에이', '코코모'로부터 출발해, 듀스의 '여름 안에서', 바비킴의 '한잔 더'를 거쳐,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 '스타맨'으로 우주에 갔다가, 톱로더의 '댄싱 인 더 문라이트', 글렌체크의 '식스티스 가르댕'으로 신나는 춤판으로 이끄는 식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진짜 디제이'라 여기진 않았다. 엘피나 시디 대신 디지털 음원을 유에스비(USB)에 담아 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디제이 장비를 이용한 '믹스'는 꿈도 못 꿨다. 그저 한 곡이 끝나갈 즈음 볼륨을 살살 내리면서 다음 곡의 볼륨을 올리는 수준이었다. 이런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도 헤드폰을 쓰고 뭔가 열심히 만지는 척을 하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은 신경쓰지 않고 맥주만 들이켰지만 말이다.

지난 24일 새벽 2시 서울 경리단길 들머리에 자리한 '도조 라운지' 클럽. 이곳에서 '진짜' 디제이를 만났다. 커다란 금테 잠자리 안경에 2 대 8 가르마로 빗어넘긴 머리, 위아래로 맞춰 입은 감색 '땀복'…. 1980년대에 냉동됐다가 갓 깨어난 분위기다. 잔뜩 싸온 시디를 꺼내 80년대 디스코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헉, 그런데 갑자기 익숙한 가락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조영남의 '화개장터'다. 이 노래를 알 리 없는 외국인들도 즐거워하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뭔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김국환의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 김흥국의 '호랑나비' 같은 추억의 가요에 20~30대 젊은이들이 환호하며 넘어질 듯 말 듯 '호랑나비 춤'을 췄다. '오빠 생각',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가 결혼한다는 노랫말의 '코끼리 아저씨' 등 동요가 흐르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떼창'을 했다. 마지막 곡은 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가인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나이·성별·국적을 넘어 손을 잡고 좌우로 흔들며 대동단결하는 올림픽 폐막식 같은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날 1시간 동안 디제잉을 한 이는 '타이거 디스코'. 독특한 선곡으로 나름 인기를 끌고 있는 디제이다. 하지만 이를 전업으로 하는 프로페셔널은 아니다. 본명 이기범(29)으로 돌아오면 한식 요리사가 된다. 서울 여의도의 호텔 '콘래드 서울' 뷔페 식당이 그의 직장이다. 80년대 옷차림과 80년대 디스코 음악이 좋았던 그는 2012년부터 디제잉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20여만원을 주고 산 입문용 디제이 장비를 붙들고 씨름하며 기능을 익혀나갔다. 이제는 주말마다 디제잉을 하는 어엿한 정식 디제이가 됐다. 클럽을 옮겨다니며 하루 두 탕씩 뛰기도 한다.

주중에는 요리사주말에는 디스코DJ"내가 트는 음악에사람들이 열광하면뿌듯한 쾌감 밀려와"

"평일엔 주방에서 일하고 주말에 디제잉을 하다 보면 피곤하죠. 그래도 정말 재밌고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내가 트는 음악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뿌듯한 쾌감이 밀려와요." 그는 "제 영향을 받아 호텔의 다른 요리사 2명도 장비를 사서 디제잉을 독학하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홍대 앞 '잼세션 뮤직 아카데미'. 박대웅(44)씨가 디제이 장비 앞에서 헤드폰을 쓰고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다. 아이티 회사에 다니는 그는 올해 초부터 디제잉을 배우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그는 세계적인 디제이 마르쿠스(마커스) 슐츠의 영상을 우연히 보고 전자음악의 한 장르인 '트랜스'에 빠져들었다. "트랜스가 클래식 소나타의 기승전결과 비슷하고 감성적·서정적이더라고요. 트랜스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어 디제이 장비를 배우고 있어요." 박씨는 디제잉을 배우면서 인생이모작의 꿈도 갖게 됐다. "국내에 거의 없는 트랜스 전문 클럽을 만들어 디제잉도 하고 작곡도 하고 싶어요. 기술의 발달로 곧 나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게 작곡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방송사 사업국에서 일하는 노영진(46)씨는 지난해 9월부터 이곳에 다녔다. "남들 앞에서 디제잉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혼자 음악을 폭넓게 듣는 게 좋아서 하는 거죠. 여기만 오면 복잡한 회사 일도 싹 잊고 정말 즐거워져요." 올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승아(19)양은 디제이가 되려고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디제이 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좋아하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루 종일 듣는 직업이 뭘까 생각하다 디제이가 되기로 했어요. 여자 디제이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점차 늘고 있어요. 언젠가 꿈의 페스티벌 무대에 서고 싶어요."

잼세션의 김영동 실장은 "최근 몇년 새 수강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과 대학생으로, 20~30대가 많지만 40대 이상도 있다"고 전했다. 잼세션이 2009년 처음 문열 때만 해도 디제이 학원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홍대 앞, 강남은 물론 지방에도 적지 않다고 한다.

김 실장은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 코리아' 같은 일렉트로닉 음악 페스티벌이 끝난 직후 문의가 특히 많이 온다고 했다. 페스티벌에서 디제이를 접하고 "나도 배워볼까?"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클럽이나 페스티벌뿐 아니라 어디서도 디제이를 접할 수 있으니까요. 대학 축제, 결혼식 피로연에도 디제이를 불러요. 직장인 수강생 한 분은 회사 야유회와 송년행사에 가서 디제잉을 했대요."

누구나 디제잉에 쉽게 도전하게 된 데는 장비 발전의 영향도 크다. 엘피나 시디 없이 디지털 음원만으로 얼마든지 디제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컴퓨터나 아이패드에 연결해 쓰는 디제이 장비 컨트롤러의 경우 30만원대부터 있다. 디제이 장비 전문 매장인 '디제이코리아'의 최은석 대리는 "지난 15~17일 춘천에서 열린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에 장비 부스를 마련했더니 많은 분들이 찾아와 관심을 보였다. 일반인이 디제잉을 하는 부스도 마련했더니 지원자가 30~40명이나 몰렸다"고 전했다.

잼세션에서 강의하는 디제이 루바토는 말한다. "엘피로 디제잉을 하던 시대에 디제이는 신 같은 존재였어요. 어렵게 엘피를 구해야 하고, 현란한 테크닉도 필요했죠.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음원을 구하기 쉬워졌고, 장비도 발전해 다루기가 어렵지 않아요. 신의 영역에 있던 디제이는 이제 좋아하는 음악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즐기는 친구의 영역으로 내려왔어요." 그럴수록 디제잉의 본질이랄 수 있는 선곡이 중요해졌다고 그는 강조했다. 장비의 도움으로 곡과 곡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논스톱 믹스'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만큼, 이제는 어떤 음악을 어떤 흐름으로 틀 것인지로 디제잉 실력이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다 보니 예전에 엠펍에서 1일 디제이를 했던 것도 나름 의미있는 디제잉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매체와 테크닉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질은 음악 자체다. 이를 매끄럽게 이어서 들려주는 수단으로 디제잉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갑자기 자신감이 솟는다. 나도 배워볼까?

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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