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철의 링딩동] 박찬희와 5.18, 그리고 장정구..

입력 2015. 5. 27.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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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시작 1년 만인 1973년, 만 16세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우승했다. 이듬해인 고2때는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갖춘 천재복서의 출현이었다. 그는 거액을 제시한 실업팀들의 입단 제의를 뿌리치고 동아대학교에 입학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8강전에서 호르헤 에르난데스 파드론(쿠바)에게 2-3으로 석패하면서 메달권 진입에 실패하지만, 파드론이 L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그와의 8강전이 실질적인 결승전과 다름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 플라이급에서 세계를 제패한 박찬희 스토리의 서막이다.

챔피언시절 박찬희의 모습.

전 세계가 주목한 플라이급의 최강 박찬희

박찬희는 127전 125승 2패의 엄청난 아마추어 전적을 뒤로 하고 대학교 2학년이던 1977년 7월 프로에 데뷔한다. 여전히 빼어난 테크닉에 힘과 세기까지 장착한 그는 프로데뷔 20개월 만에 세계 도전의 기회를 잡게 된다. 상대는 ‘링의 대학교수’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WBC 플라이급 챔피언 미겔 칸토(멕시코)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14번이나 타이틀을 방어해낸 기교파 베테랑 칸토는 여유만만하게 국내 땅을 밟았고 9전에 불과한 22살의 풋내기 도전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1979년 3월 18일, 박찬희는 15라운드 내내 챔피언을 일방적으로 유린하고 타이틀을 따내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칸토의 모국인 멕시코 부심까지도 박찬희의 우세로 채점할 수밖에 없었던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는 전 WBA 동급 챔피언인 구티 에스파다스(멕시코)의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에스파다스는 박찬희에게 도전하기 직전 11경기에서 10승(10KO) 1패의 상승세였고 그중에는 6번의 세계타이틀매치(5KO승 1판정패)가 포함되어 있는 하드펀처였다. 박찬희는 1회에서 선제 다운을 빼앗겼으나 곧바로 역전 다운을 이끌어낸 뒤 2회에서 전 챔피언을 녹아웃시키고 칸토에게 거둔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한다. 명실상부한 세계 플라이급의 넘버원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박찬희는 1980년 4월 12일 알베르토 모랄레스(멕시코)를 퍼펙트한 판정으로 누르고 5차 방어에 성공했다.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세계타이틀 획득부터 5차 방어전까지 불과 1년 1개월. 당시 15라운드로 벌어졌던 세계타이틀전을 2개월 간격으로 여섯 차례나 치러낸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5차 방어전이 끝나자마자 1개월 후인 5월 18일에 6차 방어전이 덜컥 잡혔다. 도전자인 오구마 쇼지(일본)는 한 차례 세계챔피언을 지낸 적이 있었지만 박찬희에게 패했던 칸토와 에스파다스에게 각각 판정패와 KO패했던 터라 세계 최강자인 박찬희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럼에도 15라운드를 풀로 소화한 챔피언에게 휴식도 없이 1개월 6일 만에 다시 치러야 하는 방어전은 아무래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천재복서 박찬희의 몰락, 그리고 5월 18일의 광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12.12 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대한민국을 다시 군사독재 체재로 회귀시키고 있었다. 이에 전국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확산되었고 급기야 1980년 5월 15일에는 전국 학생 연대의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신군부에서는 5월 18일 자정을 기점으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시위 진압 계엄군과 학생, 시민들의 충돌이 거세지며 제7공수여단의 헬기가 광주로 향하던 그 시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박찬희가 오구마 쇼지를 상대로 WBC 플라이급 타이틀 6차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플라이급 세계 최강 챔피언의 무난한 방어가 예상되던 경기였다. 그러나 챔피언의 압승을 기대하던 관중들과 TV 앞에 몰려있던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박찬희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젊은 챔피언은 살인적인 일정으로 말미암아 링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오구마의 투혼은 대단했다. 결국 박찬희는 시종 무기력한 경기 끝에 9회 18초 만에 오구마의 보디블로를 허용하고 KO패,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일본 복서로는 사이조 쇼조, 시바다 구니아키에 이어 세 번째의 해외원정 타이틀 획득이라는 쾌거를 덤으로 안겨준 채.

문제의 그날, 1980년 5월 18일에 열린 박찬희(왼쪽)의 마지막 방어전. 상대는 일본의 오구마 쇼지였다. 사진=일본 <복싱매거진> 제공

박찬희의 패배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다.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철저한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1년 2개월 동안 쉼 없이 일곱 번의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러낸 박찬희는 심신이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광주에서는 결국 총성이 울리고 말았다.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고 광주 지역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해버린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극의 시작이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아픔은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 아주 조금씩 외신을 통해 전해졌고 엄청난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걸려야만 했다. 전 국민이 아파야 했던 그날이었기에 하늘이 박찬희의 승리를 허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복서 장정구의 마지막 도전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 ‘위대한 챔피언’ 장정구는 그의 복싱 인생에서 마지막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타이틀 15차 방어를 마치고 챔피언의 자리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던 그는 링 복귀 후 한 체급 위의 플라이급으로 월장했다. 장정구는 1990년 11월 챔피언 시절 3차 방어 상대로 한 차례 꺾었던 소트 치탈라다(태국)의 WBC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0-2(114-115, 113-114 114-114) 판정으로 패하고 말았다. 잘 싸웠음에도 홈 링에서 충분한 어드밴티지를 갖지 못하고 아쉬운 판정패를 당하자 즉각 리턴 매치가 추진되었다. 그 사이 치탈라다는 동국의 라이벌 무앙차이 키티카셈에게 6회 KO패로 타이틀을 넘겨줬고 새로운 챔피언 키티카셈에게 장정구의 플라이급 재도전이 성사되었다.

1991년 5월 18일 서울 잠실의 올림픽 체조경기장. 세계타이틀에 다섯 번째 도전하는 장정구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 링에 올랐다. 시간은 한낮이었고 관중석은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았다. 어색했다. 장정구의 전성기이던 1980년대의 프로복싱 중계시간은 골든타임인 저녁 7~8시 정도였고, 만원 관중은 기본에 시청률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복싱의 인기가 조금씩 시들어가던 90년대 초반, 링사이드를 제외하고는 다소 썰렁한 관중석과 대낮에 편성된 중계시간은 천하의 장정구에게도 낯선 풍경이었다.

5월 18일 경기에서 키티카셈을 다운 시킨 장정구(오른쪽).

스물 세 살의 왕성한 챔피언에 비해 복싱 나이는 이미 노쇠한 도전자는 한눈에도 체격과 체력에서 다소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밀리는 힘을 풍부한 경험과 노련미로 극복해낸 장정구는 5라운드에서 두 차례의 다운을 빼앗아내고 11회에서도 원투로 챔피언을 다운시키는 등 도합 세 차례나 키티카셈을 캔버스에 뉘였다. 힘은 다소 부쳤지만 이제 마지막 12라운드만 지켜낸다면 두 체급 석권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스무 번째의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르는 베테랑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모두가 판단했던 그 순간, 마지막 라운드의 시작 공이 울리자마자 장정구는 온 힘을 다해 챔피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챔피언은 도전자의 무모한 러시를 침착한 받아치기로 대응했고 결국 12라운드 2분 38초 만에 레퍼리 스톱이 선언되었다. 그의 복싱 인생 최초의 KO패였다. 주심은 어떻게든 경기 종료까지 기회를 주려 했지만 장정구의 다리에는 이미 서있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결과였다. 왜 마지막에 무리수를 두었는지 장정구의 무모한 러시은 모든 이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11라운드가 끝난 뒤 장정구 코너로 전달된 부심들의 스코어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주심만이 104-102로 장정구의 우세를 채점한 반면 한 부심은 103-102로 챔피언의 우세를, 다른 한 부심은 102-102 동점으로 11회까지의 판정은 무승부였다. 12라운드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면 타이틀 획득은 불가능했다. 장정구는 마지막 라운드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낳은 불세출의 복서 장정구의 마지막 도전은 그렇게 종료 공 소리를 불과 22초 남겨둔 채 멈췄고 이 도전은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991년 5월 18일 열린 '위대한 복서' 장정구의 마지막 순간.

에필로그

35년 전의 5월 하늘은 아름다웠고, 24년 전에도 푸르렀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맑고 청명하다. 어린 시절의 영웅 박찬희의 몰락, 그리고 11년 뒤 온 몸의 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사력을 다하던 장정구의 마지막 모습은 5.18 광주 하늘의 시린 잔상과 함께 아픈 역사 속에 묻혀있다. 해마다 5월 18일이 되면 광주 희생자 영령을 추모하면서 복싱에 대한 아련한 추억 2개를 더듬는다.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챔피언시절의 장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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