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햇빛이 보고 싶어요".. 경찰 지구대에 걸려온 어느 장애인의 전화

박세환 기자 입력 2015. 5. 27. 02:11 수정 2015. 5. 27.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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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태우고 문밖 나서자 눈부신 햇살에 복받친 눈물 "이런 일까지 시켜 미안해요"

지난 22일 오후 1시쯤 서울 강서경찰서 공항지구대로 다급한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빨리 와 달라"고만 했다. 말이 몹시 어눌했다. 이승재(42) 경사와 조의지(37·여) 순경은 곧바로 방화동의 한 임대아파트로 향했다. 신고자의 불분명한 발음 탓에 몇 번을 물어 겨우 찾아간 곳은 김포공항 근처의 5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수십 차례 더 통화해 현관 잠금장치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연 조 순경은 깜짝 놀랐다. 집 안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컴컴한 방 한가운데 신고자 A씨(64)가 홀로 누워 있었다. 옆 건물에 가려 가뜩이나 햇빛이 들어오기 힘든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세간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오줌 냄새가 심하게 났다.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자 A씨는 내복 상의만 입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오래돼 늘어져 있었다. 놀라는 경찰에게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햇빛, 햇빛이 보고 싶어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A씨는 신체 중 오른손만 쓸 수 있는 장애인이었다. 노점상 등 온갖 일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5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거동은 가능했는데 설상가상 지난 1월 침대에서 떨어져 온몸에 마비가 왔다. 사촌동생 도움을 받아 1급 장애 신청을 했지만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 간병인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주기적으로 사촌동생이 찾아와 청소 등을 돕는데, 대부분은 혼자 집에서만 지낸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것도 혼자 용변을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요즘 누구나 즐기는 5월의 햇살도 이런 그에게는 '사치'였다. 그래도 이날은 용기를 내서 112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햇볕을 쬐게 해 달라고.

조 순경과 이 경사가 집에 있던 휠체어에 A씨를 태우고 문을 나서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온몸으로 햇볕을 감당하던 A씨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경찰관은 그늘을 피해 휠체어를 밀며 아파트단지 안을 잠시 돌아다녔다. 한 벤치 앞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어눌한 말로 "이런 일까지 부탁해 정말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두 경찰관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누군가는 너무 일찍 더워졌다고 타박할 햇볕이 그에게는 이렇게라도 느껴보고 싶은 '열망'이었다.

20여분 햇볕을 쬔 A씨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경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출동 지시가 떨어져 할 수 없이 A씨를 두고 떠났던 조 순경은 3시간 뒤 다시 찾아갔다. A씨는 벤치에 없었다. 오후의 햇살을 한참 만끽하고는 이웃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이 경사와 조 순경은 26일 오후 A씨 집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마음이 쓰였다. 한결 밝아진 표정에 두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 순경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며 "주기적으로 A씨를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고 바깥 구경도 시켜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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