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S담쓰談]전창진과 이왕표, 누가 과연 진짜이고 가짜인가

조회수 2015. 5. 26. 13: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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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5일. 한국 스포츠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현역에서 은퇴했고, 또 다른 인물이 옷을 벗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는 소식이 들린 날이다.

그들은 바로 프로레슬링 스타 이왕표(61)와 프로농구(KBL) KGC인삼공사 전창진 감독(52)이다.

이왕표는 40년 동안 선수 생활을 마치는 무대에서 각계 각층의 격려 메시지와 후배들의 축복 속에 명예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전 감독은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승부 조작에 연루됐다는 추문에 휩싸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전 감독은 불명예스럽게 스포츠계를 떠나야 한다.

< '누가 과연 진짜일까' 25일 40년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는 은퇴식에서 눈물을 쏟는 프로레슬링 대부 이왕표(오른쪽)와 같은 날 승부 조작 혐의가 보도된 프로농구 KGC인삼공사 전창진 감독.(자료사진=스포츠조선, KBL) >

이 두 종목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뗄래야 뗄 수 없었던 스포츠였다. 엄밀히 따져 철 들기 전과 철 든 후(정말 그럴까?)를 나누는 종목이었던 것이다. 초등, 중학교 시절 그토록 열광했던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이었다면 이후 농구에 빠져들어 지금의 직업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두 인물의 소식이 더 안타깝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프로레슬링은 70년대부터 복싱과 함께 국민적 인기를 누린 스포츠였다. 역도산의 뒤를 이은 '박치기왕'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이 링 위에서 벌인 '활극'에 전 국민이 열광했다.

이왕표는 김일의 지도를 받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적자였다. 1975년 김일 체육관 1기생으로 데뷔해 40년 동안 링을 누볐다. 2000년에는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세계 챔피언 등 7번이나 챔피언에 올랐다. 80년대부터 야구와 축구 등의 급성장 속에 프로레슬링 인기가 꾸준히 하락세에 접어들었어도 꿋꿋하게 링을 지켜왔다.

< 6, 70년대 프로레슬링 인기를 이끌던 '박치기왕' 김일(왼쪽)과안토니오 이노키.(자료사진=일간스포츠) >

사실 한국 프로레슬링은 8, 90년대 중후반부터 인기를 얻은 WWF 등 미국 프로레슬링에도 밀렸다. 헐크 호건, 얼티미트 워리어(지난해 사망)를 비롯해 '마초맨' '홍키통키맨' '밀리언 달러맨' 등 확실한 캐릭터와 화려한 기술을 가진 WWF는 당시 초, 중학생들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당시 필자도 동네 목욕탕에서 형형색색의 긴 목욕 타월을 팔에 감고 워리어의 흉내를 냈던 기억이 난다. 체구가 작았던 한 친구는 자신이 구사할 수 없는 워리어의 기술을 구현해내기 위해 자기를 들어 메쳐달라는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링이 아닌 냉탕에서였다. 그러다 목욕탕 주인의 호통에 쫓겨나기도 부지기수.

그럼에도 한국 프로레슬링은 무엇인가 설명하지 못할 정감이 있었다. WWF가 갖지 못한 한국인 특유의 정서랄까 오밀조밀한 맛이 있었다. 직접 WWF 경기를 관전하지 못하는 갈증을 해소시키는 차원도 있었을 것이다. 워리어 기술의 희생양이 됐던 친구는 이왕표가 나오는 경기를 직접 보고 온 뒤 팬이 되기도 했다.

그랬던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하자 프로레슬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진짜가 아닌 '짜고 치는' 경기임을 알게 된 까닭이다. 유난히 일찍 철든 한 친구와 '프로레슬링의 각본'과 그 진위 여부를 놓고 눈에 쌍불을 켜고 설전을 벌였던 필자 역시 이상과 현실을 깨닫게 됐던 기억이 난다.

< 이왕표(오른쪽)와 밥 샙이 지난 2009년 격돌하는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 >

그 친구들은 고교 시절부터 대부분 농구에 빠져들었다. 야구, 축구와 달리 대규모(?) 인원 없이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농구는 쉬는 시간 틈틈이 즐길 수 있는 고교생의 안성맞춤 스포츠였다. 당시는 농구 대잔치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때마침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 등 농구 관련 만화와 TV 드라마도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농구의 매력은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데 있다. 특히 농구는 짧은 시간을 남기고도 승부가 여러 차례 뒤바뀌는 박진감에 '버저비터'의 짜릿함까지 극적인 요소가 어느 스포츠 못지 않게 극대화할 수 있는 종목이었다.

90년대 초중반 연세대와 고려대 등 패기의 대학팀들이 형님인 실업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넘어서는 기량을 선보인 점도 '각본 없는 드라마'였기에 가능했다. 정점을 찍었던 농구의 인기는 KBL이 출범해서도 얼마간 열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KBL의 인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하락세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과 김승현(은퇴), 김주성(동부) 등의 가세로 반짝했던 KBL은 좀처럼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

< 2014-2015 KCC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동부를 꺾고 우승한 모비스 선수단이 기뻐하는 모습.(자료사진=KBL) >

WWF 등에 밀렸던 한국 프로레슬링처럼 화려한 개인기를 갖춘 외국인 선수들의 가세에 국내 선수들이 경쟁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스타 발굴이 어려웠다. 여전히 문경은 SK, 이상민 삼성 감독과 서장훈(은퇴), 현주엽 해설위원 등 농구대잔치 시절 인물들이 현역 선수들보다 인지도가 높은 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각본 없는 드라마'라던 농구의 매력에도 치명적인 흠집이 갈 만한 사건이 최근 또 일어난 것이다. 2013년 강동희 전 동부 감독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승부 조작의 어두운 그늘이 KBL에 몰려온 것이다.

전창진 감독은 일단 혐의를 받고 있을 뿐, 수사 등을 통한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황이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 자신이 맡고 있는 팀 경기에 불법 베팅해 2배 가량의 부당 이득을 얻은 상황에 대한 관련자들의 진술이 확보돼 있다. 2년 전 강동희 감독 때처럼 될 가능성이 높은 게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전 감독은 KBL을 대표하는 명장이다. 2002-2003시즌 TG삼보(현 동부) 사령탑을 맡자마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거머쥐는 등 챔프전 우승 3번을 일궈내는 등 감독상만 5차례 받았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수 차례나 썼다. 특히 감독 첫 해 당시 김승현이 이끄는 오리온스와 챔프전에서 명승부 끝에 정상에 섰다.

< 2002-03시즌 TG삼보 시절 전창진 감독(가운데부터 오른쪽으로)이 오리온스를 꺾고 우승한 뒤 허재, 김주성 등과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자료사진=KBL) >

만약 전 감독에 대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상상하기조차 싫은 승부 조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정말이지 왕년 어린 시절을 충만하게 채워줬던 두 종목 간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지 혼란이 올 것 같다.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럼에도 프로레슬링이 스포츠로 분류되는 것은 선수들의 땀과 노력 때문일 테다. 미리 짜놓은 각본이라도 고난도 플레이를 펼치기 위해 수없이 넘어지고 링을 구른다. 어떨 때는 피가 쏟아지고 뼈가 부러지는 등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위험을 무릅쓴 이들의 열정과 화려한 묘기에 관중은 '각본을 알고도' 열광하는 것이다.

하지만 농구는 다르다. 아니 프로레슬링을 제외한 모든 스포츠가 그럴 것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위해 비지땀과 눈물을 흘리는 노력을 쏟아붓는다. 하물며 각본이 있는 프로레슬링이 그럴진대 진짜 승부를 펼쳐야 할 종목은 오죽하랴.

그런 농구지만 '각본이 있는 경기'가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가치를 한 순간에 날려버린 슬픈 경기들. 만약 승패가 미리 결정됐다면 그것은 이미 농구가 아니다. 스포츠가 아니다.

< '과연 진정한 스포츠는 무엇일까' 25일 이왕표 은퇴식 경기에서 노지심(왼쪽)의 경기 모습과 전창진 감독이 지난 시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자료사진=마이데일리, KBL) >

그렇다고 그게 프로레슬링이 될 수도 없다. 프로레슬링은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 미리 짜놓은 승부라도 어떻게 하면 경기를, 플레이를 더 멋지게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일념에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다. 각본 때문에 관중의, 팬들의 김이 샐까 더 치열하게, 리얼하게 하는 것이다. 모두가 각본을, 결말을 미리 알고 있더라도 흥미진진한 이유다.

하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를 펼쳐야 할 농구의 대본은 그야말로 비양심이다. 선수도, 심판도, 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각본이기 때문이다. 각본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 경기는 가짜요, 알고 본 사람이라도 그 경기는 진짜가 아니게 된다.

양심을 속이는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흘린 땀의 가치로만 온전히 평가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레슬링은 스포츠다. 그러나 농구라도, 어떤 정통 스포츠라도 짜여진 각본이 있다면 스포츠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왕표와 전창진 감독의 소식이 전해진 2015년 5월25일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 땀으로 이미 가짜인 경기의 진짜화를 완성하며 스포츠 정신을 구현해온 인물과 땀으로 거짓말 같은 진짜 경기를 만들어냈어야 할 책무를 유기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 명예에 심각한 훼손이 간 인물의 씁쓸한 대비다.

내 유년기 시절의 막판, 프로레슬링이 지닌 각본의 존재에 느꼈던 배신감보다 이제 현실을 깨닫게 됐다고 생각해온 장년기에 더 큰 실망감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칼럼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 쓸데없이 섣부른 판단으로 쓰여진 기사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CBS노컷뉴스 체육팀장 임종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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