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덜미 잡힌 60대 사기꾼의 '가짜인생 12년'

황인호 심희정 기자 2015. 5. 25.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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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부터 남의 이름으로 살며 교수·재개발추진위원장 등 사칭

"나○○씨!" 사기 혐의로 지명수배 중이던 나모(62)씨는 자신을 부른 사람이 경찰임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12년간 다른 사람 입으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자신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동안 나씨는 실체를 꽁꽁 숨긴 채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 경찰에 붙잡힌 지난 18일에도 남의 이름으로 치과 진료를 받고 나오던 길이었다. 그는 2007∼2008년에만 3명에게 5억2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나씨는 2003년부터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점잖은 외모와 언변을 무기로 주로 여성을 노렸다. 환심을 사는 데 시간과 공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강서구에서 식당을 하던 이모(60·여)씨에게 접근한 건 2005년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대를 이용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매일 혼자서 이씨 가게를 방문했다. 단골손님을 마다할 상인은 없었다.

나씨는 이씨에게 자신을 서울 유명 사립대 교수라고 속였다. 이름은 실제 재직 중인 교수 이름 석자에서 마지막 글자만 바꿔 알려줬다. 이런 내막도 모르고 이씨는 꼬임에 넘어갔다. 이씨가 마음을 열자 나씨는 노골적으로 다가갔다. 가정이 있던 이씨에게 이혼을 종용했다. 이씨의 아이들에겐 재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전임교수가 되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이씨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씨는 나씨에게 2008년까지 3년간 9차례에 걸쳐 7500만원을 건넸다. 가게를 접으면서 받은 보증금과 권리금을 모두 털어 줬다. 돈을 받은 나씨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씨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

그 무렵 나씨는 서울 모 재개발지역 추진위원장의 모습으로 윤모(48·여)씨에게 나타났다. 윤씨 지인을 조합장으로 만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또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주변 아파트 3채를 분양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며 중도금과 잔금을 요구했다.

윤씨가 2008년 1∼4월 나씨에게 준 돈은 1억6500만원이었다. 그러나 윤씨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끊겼다. 나씨는 같은 해 9월 노모(60)씨에게 접근해 "은평 뉴타운 상가 조합장을 시켜주겠다"며 한번에 2억8600만원을 받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나씨는 지난 18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체포됐다. 행적을 추적해 온 경찰은 그가 한 치과에 자주 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열흘 넘게 잠복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나씨를 구속했다.

나씨는 범행이 드러날까봐 자신의 정체와 관련한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체포 당시 그에게선 신분증이나 명함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집에 있던 주민등록증이 유일한 신분증이었다. 이 주민등록증은 종이재질에 비닐코팅을 한 구형이었다. 주민등록증은 2000년부터 플라스틱 형태로 바뀌었지만 나씨는 바꾸지 않았다. 현재의 모습을 남기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주민등록증에는 스무 살 나씨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24일 "나씨가 실명을 쓰지 않아 고소장에 적힌 이름도 다 달랐다"며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씨는 치과에서 사용한 이름이 자신을 도와주는 여성 중 한 명의 남편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체포되던 날에도 어떤 여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치과에 갔다. 나씨는 경찰에 "고소장이 수십건은 더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황인호 심희정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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