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입시 비리 의혹 덮자고?'..수상한 성명서

주영민 기자 2015. 5. 2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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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고교감독자 협의회라는 곳에서 '입시비리 관련 성명서'를 냈습니다. 제목만 보면 뭔가 입시비리 근절을 위한 자정 노력을 하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입시비리 의혹을 덮자'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얼마전 제가 취재파일을 통해 보도한 '입시비리 의혹'에 대해 해명과 반론으로 느껴질 정도 였습니다. 왠지 '제 발 절이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수상한 성명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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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시 비리 막으려는 '기준'도 모른다?

성명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실적 증명서 발급과 관련하여서는 서울시 16개 고교 야구감독자 전원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대한야구협회에서 주장하는 1이닝, 3타석이라는 실적 증명서 발급 기준은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2011년 고교야구가 주말리그로 전환하면서 팀 성적보다 선수 개개인의 성적 위주로 대학입시를 평가하도록 입시요강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고교야구 감독자들은 모두가 "'실적증명서 발급 기준'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주말리그 실시 이후 개인의 성적 위주로 입시 평가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필요가 없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래는 대한야구협회가 입시비리를 막기 위해 실적증명서 발급 강화 지침을 각 시도지부에 발급한 공문입니다.

당시까지는 소속팀이 8강에만 오르면 1번만 출장해도 대학 입학자격이 부여돼 많은 입시비리가 있었습니다. 야구협회가 이점을 보완하기 위해 실적증명서 발급 기준을 '한 대회에서 투수는 1이닝, 타자는 3타석 이상 출전'으로 강화한 것입니다. 입시비리를 막기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지침입니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지도해야 하는 고교 야구 감독들은 "난 모르겠고, 이젠 필요없다."고 합니다. '나는 법을 모르니 그 법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 주말리그 도입 이후 팀 성적보다 개개인의 성적 위주로 입학이 이뤄지기 때문에 이 기준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실적 증명서는 개개인의 성적을 확인하는 기록지가 아닙니다. 선수의 실적에 대한 대한야구협회의 '내용증명', 한 마디로 법적으로 인정되는 공문서입니다.

그것도 대학입학 서류전형 때 제출해야 하는 필수 서류입니다. 그래서 엄격한 실적 기준에 따라 발급돼야 합니다. 그런데 증명서 발급에 기준이 필요없다고 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개개인의 성적은 대한야구협회를 통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적증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입시 비리 의혹'은 이 기준에 미달하는 실적이 증명서에 기재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그것도 수시지원 마지막날 재발급되면서 의혹을 키웠습니다. '부정입학' 의혹이 제기된 A군과 B군의 증명서에 기준에 미달된 '왕중왕전'기록이 추가되지 않았다면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번에 입시비리 의혹을 제기한 뒤 학부모들의 많은 제보를 받았고, 취재 범위를 넓히면서 야구계의 입시 관행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했습니다. 과연 이 현상을 어떻게 어디까지 기사화해야할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수시 원서를 내기도 전에 이미 합격자가 정해지는 게 현실"이라고 학부모들이 입을 모을 정도로 대학 감독과 고교 감독의 입시 관련 연결고리는 뿌리가 깊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야구종목 특기생 입시 경쟁률은 매년 1대1에 가깝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기묘하죠?

학부모들은 물론 많은 야구인들은 이번 '입시 비리 의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대로만 수사가 된다면 엄청난 파장과 함께 입시 환경 개혁에 단초가 될 것이라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시비리'관련 수사가 진행중인 시점에 고교 감독들은 왜 이런 '성명서'를 냈을까요? 의혹을 덮고 싶은 걸까요?

● "전 성명서 모르는 데요?"…배후는 누구?

이 성명서는 고교야구 감독자협의회 일동 명의로 나왔습니다. 마치 서울시 모든 감독들이 들고 일어난 듯 합니다. 그래서 몇몇 감독들에게 전화를 해 봤는데, 성명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감독도 있었고, 대충 얘기만 듣고 알아서 하라며 위임해 줬다는 감독도 있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배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제 발 저리는' 몇몇 인사가 고교 감독들을 앞세워 이런 성명서를 내게 해서 '야구비리 의혹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이 성명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고교야구지도자들은 박상희 신임 대한야구협회장의 당선을 축하하며 취임사에서 밝힌 강력한 아마야구 개혁의지를 적극 지지합니다. 신임 회장님과 함께 새롭게 도약을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야구인들을 '패거리'로 묘사하며 거센 비난을 받았던 박상희 회장을 갑자기 지지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개혁은 뭘까요?

역사는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개혁을 주장하는 무리는 개혁의 대상'일 때가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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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민 기자 nag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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