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만세'를 외칠 수 없는 오늘

김형민 2015. 5. 2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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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기 좋아하는 네게 숙제 하나 내볼까? 네가 시나리오 작가라고 치고 조폭 악당이 누군가를 자살로 위장해서 죽이려 하는 대목을 상상해보렴. 먼저 뭘 해야 할까? 그렇지! 유서. 자살(?)해야 하는 사람에게 '이걸 써놓고 죽으면 네 가족은 우리가 책임진다'라고 꼬드기든 '곱게 죽을래, 아니면 고통받으며 죽을래' 하며 협박을 하든 피해자로 하여금 직접 유서를 쓰게 해야 할 거야. '부모님 먼저 갑니다. 여보. 아이들 잘 키워주시오' 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피해자가 끝까지 유서 쓰기를 거부한다고 쳐. 그때 악당이 씩 웃으며 '그럼 우리가 써주지' 하며 피해자 대신 유서를 쓰는 장면이 등장한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네 말버릇대로 이렇게 외칠 것 같구나. '장난해 지금? 남이 대신 써준 유서를 두고 자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다. 아니 일어났다고 대한민국 법정이 판결했단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1991년 4월과 5월은 그럴 수 없이 잔인한 봄이었다. 4월26일 서울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에 붙잡혀 쇠파이프로 잔인하게 폭행당한 후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어. 백주대낮에 경찰이 사람을 때려죽였다! 대학생들은 치를 떨었고 시민들도 분노했다. 수만명 시위대가 전국 각 도시의 거리를 점거했고 정부는 전전긍긍했어. 그런데 분노가 너무 컸던 탓일까. 강경대가 죽은 며칠 후 전남대학교에서 한 여학생이 동료 학생에게 투쟁을 호소하며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스스로 불을 붙이는 일이 벌어졌지. 이 분신(焚身)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됐어.

1991년 5월8일. 강경대 학생이 맞아 죽은 후 세 번째 분신 사건이 일어났어. 장소는 서강대학교. 죽은 사람은 대학생이 아니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줄여서 전민련)이라는 사회운동 단체에서 사회부장으로까지 활동했던 김기설이라는 사람이었어. 학생 셋이 불에 타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도 분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해. 기절초풍을 한 동료들이 그를 '감시'하며 지켰지만 김기설은 그들을 따돌리기까지 한 뒤 분신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단다.

아마 너는 도저히 이해를 못할 거야. 왜들 그렇게 소중한 목숨을 내던졌는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부르짖으며 분신했던 전태일과도 달라. 전태일은 죽음을 택하기 전에 모든 노력을 다했고 그 발버둥을 외면하고 짓밟는 정부에 대한 마지막 항의 수단으로 분신을 택한 거였지만 이때의 분신은 '내가 이렇게 결의하고 몸을 불사르니 남은 이들이여 내 대신 싸워다오' 하는 생각의 종점이었거든. 결과적으로 그 분신들은 도리어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어. 사람들이 분노한 건 정권의 폭력 때문에 한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는데, 그에 맞서 싸운다는 이들이 무더기로 목숨을 버리는 상황에 분노의 방향이 틀어져버린 거야. 위기에 몰린 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단다.

김기설씨가 분신한 5월8일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분신자살 사건의 배후에 이를 부추기는 조직적 세력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전국 검찰에 명령을 내려. 여기에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던 박홍 신부가 가세한다. 한때 반정부 활동도 했던 이 신부는 분신 직후 기자들까지 부른 공개설명회에서 성경을 손에 들고서 '죽음을 선동하거나 이용한 반생명적 세력의 실체가 있다'라고 언성을 높였어. 검찰총장이 전국 검찰에 명령하고 대학 총장이자 성직자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언하자 밑도 끝도 없던 '악의적인 소문'은 점차 '사실'의 외투를 입기 시작했어. '설마 그럴 리가' 하며 혀를 차던 사람들이 '혹시 그럴 수도'에 무게를 싣게 됐다고나 할까.

여기서 대한민국 검찰은 아빠가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장난 같은' 혐의를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게 돼. 전민련 동료였던 강기훈이라는 사람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거였지. 검찰은 강기훈의 필적이 김기설의 유서 필적과 같다고 우겼고 그를 부인하는 모든 증거를 물리쳤어. 검찰의 주장을 부인하는 김기설의 여자친구 등 주변 인물에게 구속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강기훈의 필적 맞음'이라고 회신을 보내. '친구가 자살하겠다는데 유서를 써줬다'는 자살 방조 혐의는 사실이 되어갔어.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달라고?

유서 쓰기조차 거절하는 친구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이건 '자살 방조'가 아니라 '살인'으로 다스려져야 할 일이야. 하지만 대한민국 법원은 '필적이 같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통보 외에는 어떠한 확증도 없이,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는지에 대한 소명도 없이 전도양양한 한 젊은이에게 그 친구의 '자살방조범', 즉 유서를 망설이는 친구의 유서를 써주고 '이제 죽어라'고 뇌까리는 악마의 혐의를 뒤집어씌웠단다. 1심, 2심 그리고 대법원까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보지 말아주렴. 아빠는 그 시선을 맞받을 자신이 없구나. 1심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얘기해. '이번 판결이 객관적으로 절대적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증거로 볼 때 피고인이 유서를 대신 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이 판사는 묘한 한마디를 덧붙인단다.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달라.' 이 말을 들으면 넌 더 발끈해서 말하겠지. '누가 신(神)씩이나 하래.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아빠도 물어보고 싶다. 지금도 호의호식하고 살아가는 당시의 판·검사들에게 정말로 저 젊은이가 친구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믿었느냐고 말이야. 정말이지 '인간적으로'.

세월이 흘렀다. 당시 스물일곱 젊은이였던 강기훈씨는 이제 쉰을 넘겼지. 부모님은 다 암으로 돌아가셨고 본인도 암을 얻어 투병하는 상황에서 그는 재심을 청구했단다. 2012년 12월 재심 첫 공판에서 그는 과거 검찰이 자신을 ''피고는 공산주의자 십대신조를 맹신하고 부모를 죽일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라고 불렀음을 상기시키지. 그런 논고를 들은 부모와 자식의 가슴에서 암 덩어리가 자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받아냈어. 1991년 강기훈을 악마로 만든 결정적 공로자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사실상 유서의 필적이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것임을 인정했단다. 그런데! 참으로 부끄럽게도 그런데! 검찰은 이 무죄판결을 거부하고 대법원에 상고했어. 또 하염없이 시간이 갔고 5월14일에야 강기훈씨는 최종 판결을 받게 됐단다. 무죄.

김기설 분신으로부터 꼭 24년하고도 6일 뒤의 일이지. 이 사건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간첩 누명을 쓰고 오랜 옥살이를 하다가 진실이 밝혀지면서 명예를 회복했던 드레퓌스 대위 사건에 곧잘 비유돼. 누명을 벗은 드레퓌스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하여 원대 복귀하던 날 수만 군중이 그 앞에서 '드레퓌스 만세, 진실 만세'를 부르짖었지. 5월14일에 아빠는 아침부터 인터넷 검색을 하며 대법원 판결을 기다렸단다. 무죄 소식을 들은 소감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안도였지. 24년 야만의 터널이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안도. 기쁨에 들떠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를 외치기에는 아직 우리나라는 어둡기 때문일까. 강기훈씨의 건승을 기원한다. 그를 음해했던 저 '어둠의 세력들' 보란 듯이 잘 살아주길 바란다.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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