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아서 죽인 건 아니라니까

남문희 대기자 2015. 5. 2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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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국정원이 밝힌 대로 '김정은식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었을까. 국정원이 5월13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현안보고에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갑작스러운 처형 사실을 공표한 뒤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이 숙청된 고위 간부가 등장하는 화면을 텔레비전에서 삭제해온 전례와 달리 현영철의 경우 계속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현영철 처형일로 밝힌 날은 4월30일께. 평양 순안구역 소재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에서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사총으로 총살됐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현영철이 처형됐다는 4월30일 이후, 구체적으로는 5월5일부터 12일까지 조선중앙TV에서 방영하는 기록영화에 그의 과거 동정이 삭제되지 않고 매일 등장한 것이다. 그러자 국정원 측도 '현 부장이 숙청된 것은 사실이나 처형은 아직 첩보 수준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서는 양상이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바로 직전에 발표했던 김정은 방러 정보가 오보로 밝혀지면서 이를 가리기 위해 첩보 수준의 얘기를 성급하게 흘린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연합뉴스 5월13일 국정원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처형됐다고 밝혔다. 위는 현 인민무력부장이 4월24~25일 일꾼대회에 참석한 모습(동그라미 안).

현재 미국이나 중국 등 주변 국가들도 모두 조심스러운 태도다. 이들 주변 국가 중 현영철 관련 정보에 가장 민감하게 움직인 곳이 바로 러시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영철이 숙청 직전 마지막 방문한 곳이 러시아였고, 그의 숙청이 방러와 관련됐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13일부터 일주일간 현영철은 노두철 내각 부총리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국제안보회의에 참석했다. 이는 5월9일 모스크바에서 열릴 예정이던 2차 세계대전 전승절 기념식에 김정은 제1비서가 참가할지 여부를 최종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김 비서의 참석이 무산됐으니 그의 숙청과 인과관계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과거 장성택 숙청이 북한 내 친중 라인 제거라는 차원에서 이해됐듯이 현영철 숙청은 친러 라인 제거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러시아를 긴장케 한 요인이다. 러시아 소식통에 따르면, 5월15일 현재까지 러시아 측 역시 현영철이 숙청된 것은 맞으나 처형 여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숙청됐을까. 국정원이 밝힌 현영철의 동선은 이렇다. 4월13~20일 모스크바 일정을 마치고 4월24~25일 노동당 제5차 일꾼대회에 참석, 4월27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모란봉악단 공연 참석까지는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4월28일 갑자기 사라졌고, 4월30일 김정은 비서가 일꾼대회 참석자들과 찍은 사진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 측도 그의 숙청이 '극히 최근에 결정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쪽에서는 현영철이 인민무력부장으로서 김정은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반론까지 제기한 것이 화근으로 보인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군사훈련의 수행을 둘러싸고 사달이 벌어졌다고 한다. 김정은 비서가 현 부장에게 북한 군사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을 조직하라고 했는데 현 부장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 비서에게 대남 관계 및 대미 관계와 관련해 너무 도전적인 군사전략을 추구하지 말고 이를 조절하자며 입바른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 현 부장은 그 전에도 바른말을 곧잘 했다고 알려진다. 2012년 7월 이영호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지방의 8군단장에서 전격 발탁된 뒤 강등과 복권을 반복하며 불안정한 지위를 보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 이후 군부 다잡기에 나선 김정은 비서로서는 군의 2인자인 인민무력부장이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도 않고 입바른 소리까지 하는 상황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법하다.

5월13일 국정원은 현영철의 '처형' 사유로 김 위원장 지시를 불이행하고 대꾸까지 했으며 불만을 표출하는 등 불경·불충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사유는 더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러시아 측이 조사한 내용과 정황상 일치한다.

김정은 방러 무산은 '의전' 때문?

한편 국정원이 밝힌 내용 중 '현영철이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첩보도 있다'고 한 것에 대해 러시아 측은 국방장관에 대한 숙청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현영철이 군부 내 친위세력을 구축했다는 식의 이유를 국가보위부에서 만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영철 숙청이 김정은 방러 무산 내지 친러 라인 제거와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AP Photo 5월9일 전승절 70주년 행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모스크바의 무명용사 묘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 비서의 방러가 무산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의전 때문이라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북한 측은 김정은 방러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러시아 측에 의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내용을 제시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즉 자신들의 최고 존엄이 처음으로 외국에 가는 것이니 그에 합당한 의전을 갖춰줄 수 있는지를 타진한 것이다. 국내 일부에서는 처음부터 김 비서가 이번 모스크바 기념절에 참석할 가능성이 낮았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김 비서가 원산비행장에 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사열 연습을 하는 등 방러를 앞두고 예행연습까지 했다는 정보도 있다. 방러 취소 결정이 막바지에 이뤄진 것도 북한의 특별대우 요구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사정이 있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최룡해를 통해 김 비서를 5월 전승절에 초청할 때만 해도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별 이벤트를 구상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시진핑과 아베까지 참여하는 북·중, 북·일 정상회담까지 염두에 둔 큰 그림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만류로 박근혜와 아베가 불참하면서 김이 새버렸다. 게다가 시진핑 주석마저 이번 방러 길에 북·중 정상회담을 갖기를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중국은 시 주석 방러에 앞서 김정은 비서에게 9월 베이징에서 열릴 예정인 2차 세계대전 전승절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모스크바에서의 북·중 정상회담 얘기가 나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특별 이벤트가 무산되면서 의전 문제가 새롭게 대두됐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에 참석한 누구와도 정상회담 일정을 잡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김정은 비서하고만 따로 만나는 것은 모양이 어색했다. 더군다나 북한 헌법상의 국가수반은 현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지 김정은 비서가 아니다. 정상들 간의 서열이나 좌석 배치, 의전 순서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 측은 이번에는 순방 자체에 의미를 두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북측이 특별대우를 받지 못할 바에야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막판에 취소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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