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납치사기 전화 받은 30代, 속은척하더니 '18원' 입금 조롱

원선우 기자 2015. 5. 2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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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편에 계속>;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꼬투리형’도 빠뜨릴 수 없다. 꼬투리 잡기는 주로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사기범을 제압하는 데 유용하다. 유튜브에 공개된 한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의 전화를 받은 한 여성은 “통장 명의 도용 사건에 연루됐으니 통장을 모두 가지고 나와 조사를 받으라”는 사기범에게 “담당 검사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다. “나오시면 담당 검사님 정해져요”라고 사기범이 답하자, “아니 담당 검사님이 없다고요?”라며 말꼬리를 잡는다. 사기범은 “조사할 사람이 200명이 넘어서 검사 한 사람이 맡을 수 없다”고 답하지만 여성은 “원래 담당 검사 아래 수사관 붙는 것 아니냐”며 추궁한다. 크게 낙심한 사기범은 결국 “야 이 ×××아, 나오라면 나오지 뭘 이리 꼬치꼬치 캐묻느냐” 욕설을 내뱉으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야 이 ×××야, 죽고 싶냐?”

드물지만 ‘욕설형’도 있다. 직장인 허모(30)씨는 지난 1월 “너희 어머니를 납치했으니 5000만원을 입금해라”라는 전화를 받았다. 허씨는 “제발 어머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말한 뒤 사기범이 말해준 계좌에 ‘18원’을 입금했다. “지금 우리랑 장난하냐. 너희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기범에게 허씨는 말했다. “우리 엄마 지금 외국 여행 가셨는데 무슨 ××이냐.” 허씨는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공동체적 복수’로 해석했다. 곽 교수는 “실제 본인은 피해 경험이 없더라도 주변 가족과 친구들이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복수심이 생긴다. 이 복수 심리가 10년 동안 공동체 전반으로 확산됐다. 시민들은 사기범들에게 심리적 치욕과 모멸을 안겨준 기록을 서로 공유하며 연대감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사기범들에게 골탕을 먹이는 것을 ‘일상의 유희’로 삼아 업무·학업 스트레스를 풀고, ‘나는 악당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일단 끊는 것이 최선”

사기범과의 ‘친밀한 대화’는 실제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 기법으로도 활용된다. 지난 2월 경기 일산경찰서 보이스피싱 수사팀 김진성 형사에게 ‘시티캐피탈 직원’을 사칭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렇게 사기 쳐서 어디 밥 먹고 살겠어?” 김 형사의 말에 20대 초반의 조직원은 당황했다. 이어 “어디야? 중국? 필리핀?” “필리핀은 망고가 맛있는데” 라는 김 형사 말에 경계심을 내려놓은 순진한 조직원은 총책의 이름과 활동 범위 등 핵심 정보를 털어놓았다. 김 형사는 “사기범들의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 수사 경험이 풍부한 형사들이 ‘동업자 형님’ 같은 말투로 자상하게 접근하면 쉽게 넘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일산서는 김 형사가 수집한 첩보를 바탕으로 보이스피싱 총책 등 7명을 검거했다. 일산서 관계자는 “요즘 검거되는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이젠 사람들이 잘 안 속아서 짜증난다’ ‘우리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때가 있어서 황당하다’고 진술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친숙한 젊은 세대가 펼치는 ‘역공’에 가로막힌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이 같은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안양 동안서는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해 70대 노인 등으로부터 3억여원을 뜯어낸 심모(22·중국)씨를 지난 18일 검거했다. 심씨는 “개인정보가 유출됐으니 계좌에 있는 돈을 모두 인출해 집안 냉장고에 보관하라”고 말한 뒤 실제로 피해자 집을 방문해 가짜 금감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돈을 챙기는 수법을 썼다. 서울 성동서 역시 같은 수법으로 2억5000여만원을 챙긴 안모(27)씨 등 8명을 구속했다고 15일 밝혔다. 피해자 중엔 90대 노모를 혼자 모시고 살던 70대 노인도 있었다.

성동서 최용욱 지능팀장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은 상대방이 ‘관(官)’을 들먹이면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요즘 노인 상대 범죄는 이러한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사기범들에게 지나친 모욕감을 안겨주면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대학생 이모(23)씨는 최근 보이스피싱 사기범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가 자취방으로 피자 20판이 배달돼 곤욕을 치렀다. 이씨는 “주소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사기범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가 ‘집으로 찾아가서 보복하겠다’는 협박 전화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경찰청 경제범죄수사대 김현수 경감은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오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김 경감은 “대화든 욕설이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눠주는 ‘반응 전화번호’는 사기단 사이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며 공유된다. 개인정보 시장에서 돌아다니는 각종 리스트를 조합해 이름·전화번호·주소는 물론 직장과 가족관계, 금융·의료기록까지 총망라된 ‘A급 리스트’를 만들어 아예 표적을 설정해버릴 수도 있다. 이 그물망에 걸리면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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