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의 한 그릇

2015. 5. 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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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두는 왜 그리고 지금, 食(식)인가.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이름 앞에 이런 표현을 넣는 게 옳을까 그에게 물었다. 이제껏 자신과 같이 음식에 접근한 사람이 없었기에 적당한 표현이 없어 오래전 칼럼을 연재하던 신문 기자가 지어 붙인 거라 했다. 지금도 역시, 그의 이름 앞에 시원하게 가져올 표현이 없다. '음식 평론가'도 찜찜하다. 그의 업은 미식의 취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의 '맛'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라' 앞서 트렌드를 형성해 맛집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음식 한 그릇에 담긴 인간의 본능과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것이 황교익의 진의다.

그에게 음식은 곧 사람이고 삶이고 세상이고 철학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간 우리가 '전문가'라는 수식어를 아무 데나 붙여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한 20년 투자해 전문성을 닦아 앞으로 나 혼자 수십 년은 이걸로 놀 수 있을 거"라 농담인 듯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음식에 대한 통찰과 철학에 능한 이로 한국에서 황교익을 따라갈 사람은 아직 없다.

<아레나> 사무실 코앞 돈가스집에 하루아침 사이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전날 방영된 tvN <수요미식회> 돈가스편 때문이었다. 가로수길에 즐비한 '<식신원정대><테이스티로드>에 나온 집' 광고판에 피로감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왜 우리는 이토록 '소문난 맛집'에 집착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먹을 것'에 집착하는가. 남이 맛있다는 걸 왜 '나도' 꼭 맛봐야 하는가. 황교익 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의 스케줄은 이미 꽉 채워진 상태였고 한 달을 더 기다렸다.

그 사이 몇 번의 통화에서 한 번은 "오늘은 술을 먹어야 하니 내일 통화합시다"라는 답을 들었다. 엉뚱하게도 그 순간, '사람 기다리게 하고 나 몰라라 할 분은 아니구나' 내심 마음이 놓였다. 술을 위해 시간을 온전히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니까. "대부분 질문이 같아 인터뷰 잘 안 한다" 하면서도 그는 약속을 잡았다. 촬영 중에도 사진은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된단다. 오랜 현역 기자 생활에서 우러나온 에디터를 위한 배려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는 잔뜩 흐리고 뿌연 하늘을 보며 "아… 어디 좀 달려야 하는데, 시원하게 달려야 하는데…" 했다.

선생님 고향이 혹시 저 위쪽이세요?아니요. 그런데 더 위쪽에 가보고 싶긴 하지. 러시아 한번 가려고 해도 비행기 삯이 엄청 비싸. 정작 시간은 얼마 안 걸리는데.

한국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 답답한 마음이 있으신가 봐요.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는 좀 있죠. 미국 '히피'들 봐요. 대륙 끝에서 끝까지 차로 일주일을 내리 달려도 못 가잖아. 한참을 달리고 달려도 끝없이 평원인 곳에서 사는 사람의 감성과 이 좁디좁은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의 감성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미국 히피들은 자연에서 오는 자유를 누리며 살지만 한국에서 히피란 건 가짜일 수밖에 없는 거지.

히피의 꿈을 간직한 채…(웃음)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셨네요.대학 졸업하고 뭘 할까 이래저래 궁리를 했어요.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단계였거든. 미술 평론을 하고 싶어서 미술 잡지도 들여다보고 했는데, 당장 돈 되는 데가 없더라고. 글을 쓰면서 살겠다는 큰 그림은 정해졌는데 어떤 글을 쓸까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안 잡혀 있었던 거지. 일단 밥이라도 벌자 해서 <농민신문>에 들어갔어요. 딱 1년만 다녀보자, 하고. 2년 차 되었을 때 음식 이야기로 글을 쓰자 결론을 냈어요.

어떤 이유였나요?다른 파트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그것도 잘 쓰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거지. 음식 쪽엔 아무도 없었어요, 경쟁자가. 정말 아무도 없었죠.

하하. 블루오션을 개척하셨군요.그게 쉬운 거야, 그게.(웃음) 어떤 음식이 혹은 어떤 재료가 언제부터 어떤 유래로 한국 사람들의 밥상 위에 올라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물론 그때도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내 초기 작업을 재밌어 하긴 했지만. 대중에게는 삼시세끼 챙겨 먹기도 힘든 때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른바 운동권 출신 친구들에게도 음식 이야기하며 따지는 것 자체가 마치 변사또가 백성들 피 빨아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음식 투정하는 정도로 보였던 거고. 하루 한 끼 때우기 힘든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이런 이야기로 친구들과 한잔하다 술판을 엎기도 했죠. 그때는 노동자의 한 끼를 확보하는 게 더 절박했으니까.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이게 맛있다, 저건 맛없다' 하는 미식만이 아니었어요. 왜 노동자들이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가, 그 근원을 들여다보며 쓰겠다는 거였지, 유럽 상류층의 미식가 클럽 같은 걸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 일을 그런 정도로만 보려고 한 거지. 나도 노동자의 자식인데.(웃음)

경쟁자가 없는 반면, 외롭기도 하셨겠다.스승이 없었죠. 이 분야에서 앞서 나간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공부한 거죠. 나름대로 커리큘럼을 짰어요. 어떤 책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후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전문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그 분야의 책을 다 읽어야 해요. 패션 전문 기자가 되려면 섬유부터 패턴, 색상, 봉제, 디자인 등등 다 봐야 하잖아요. 똑같아요. 음식도 식재료부터 가공, 위생, 유통 온갖 분야가 있어요.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말 그대로 안 다음에야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나 같은 경우엔 롤모델도 없고 제시된 커리큘럼도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읽는 거지. 당시엔 한국에 음식 관련 책도 많지 않았고. 그런데 취재 나가면 붙잡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사람들에게 밀리진 말아야 할 거 아니에요. 중요한 건 기본 지식이라는 거죠. 음식과 관련된 인문학적, 인류학적 성과부터 문화에 대한 이해, 진화론, 심리학, 이런 거 다 공부해야 해요.

세상을 보는 도구로 음식을 고르셨군요.그렇죠. 다 보여요. 영화, 미술, 음악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다 그걸 통해 보거든. 예를 들어 사회의 현실이 음악을 통해 드러나면 평론가는 인위로 무언가를 붙이고 해석하는 작업을 하죠. 난 음악이나 영화, 문학이 아닌 음식으로 하는 거고. 그런데 다른 건 있어요. 음식은 예술이라고 생각 안 해요, 나는. 그럼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일상의 음식이 무슨 세상을 보는 통로가 돼? 하지만 오히려 일상적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하는 게 가능해요.

일상적이고 대중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해석의 가치가 있다?기본적으로 예술가는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려는 욕구가 강해요. 음식에 창작자의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상상력이 과하게 입혀지면 대중은 어색해하죠.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음식을 봐요. 음식을 만들고 소개하는 사람의 의도보다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욕구가 더 많이 포함되죠. 햄버거를 봐도 만드는 사람이 햄버거를 통해 사람들이 무언가를 느끼도록 하려는 것보다 사람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먹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해요. 대부분의 음식이 그래요. 예술 분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는 대중 예술이 있고 소수에게만 소개되는 분야가 있죠. 음식 같은 경우는 대중과 보다 가까운 거고. 물론 음식을 요리한 사람의 의도를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대중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 사회가 그런 음식을 필요로 하는 배경들을 관찰하고, 그 이야기를 쓰는 거죠.

예전엔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가 가진 권력의 이미지가 컸는데, 요즘은 어떤 요리든 먹는 사람에 맞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아요.음식을 미술로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양을 예쁘게 잡지. 눈으로 보면 맛있겠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하죠. 하지만 너무 과하면 음식의 본질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해요, 나는.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온전히 먹는 사람 개인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요리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는 순간, 먹는 사람의 입장을 놓칠 수 있다는 거지. 먹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음식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요. 감상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미술 작품은 가능해요. 작가 혼자 좋은 거, 가능할 수도 있겠지. 보통 예술은 자신의 경향이나 의도를 많이 강조하는 거니까. 하지만 음식은 그렇지 않아요. 먹는 사람이 그 음식을 먹을지 말지 결정하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구가 되는 게 바로 식재료예요. 식재료 본연의 맛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요리사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사과를 가지고 요리했는데, 사과 맛을 넘어선 무엇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해요. 사과를 써서 사과 맛이 안 나는 요리를 하기도 하죠.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식재료가 지닌 그 한계점 안에서 표현을 해야지. 요리라는 것은 식재료를 본격적으로 전달하는 행위지, 식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창조하는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음식을 둘러싼 이미지에 사람들은 열광하잖아요. 저는 이 표현을 개인적으로 지양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핫하고 힙한' 음식점들 말이에요. 정말 별것 없는데도 사람들이 많은 곳을 보면서 주인이 음식 대신 심리학을 배워야 하나, 농담한 적도 있어요.인간이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어요. 쾌락을 얻기 위해 전략을 구상하죠. 생존과 자손 번식, 그 이상의 쾌락은 잉여의 무언가를 즐기는 것으로 충족되죠. 인간과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이에요. 이 잉여 쾌락의 부분이 점점 극대화되다 보니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음식을 소비하는지, 음식을 내는 식당을 소비하는지, 요리사의 외모를 소비하는지, 함께 식사를 하러 간 사람과의 쾌락을 소비하는 건지, 잘 살펴봐야 해요. 음식이 가장 중요한 소재이니까 우리는 음식을 먹으러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 음식과 관련된 주변의 여러 가지 요소에서 우리는 쾌락을 얻어요. 특히 내 앞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쾌락을 얻죠. 앞에 있는 사람이 맛있게 먹으면 나도 덩달아 맛있게 느껴요.

매슬로의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 사회적 욕구가 나오는군요.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집단을 형성하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의 동력이 바로 모방 본능이에요. 사회적 동물이 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야 하죠.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면 사회적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소통의 출발은 모방이에요. 인간은 서로 따라 하며 배워요. 말이라는 것도 그래요. 아이는 엄마를 모방하며 말을 만들어가죠. 그 모방 과정에서 얻는 게 바로 쾌락이에요. TV 보며 배우를 따라 울고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죠. 이런 게 쾌락이거든. 인간은 이런 자잘한 쾌락이 쌓이길 원해요. 본능이에요. 인간은 그렇게 진화해온 거죠. 모방 본능을 극대화하면서 쾌락을 계속 쌓는 거죠.

음식을 대입해 생각하게 되네요.처음부터 인간이 '이건 맛있는 음식, 맛없는 음식이야'라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알지? 엄마가 가르쳐요. '아~ 맛있다' 하면서 엄마가 먹여주죠. '에이, 이건 지지야. 이건 맛없어, 퉤퉤' 하고 뱉어내라고도 해요. 엄마의 말과 표정으로 아이는 음식의 여러 가지 맛을 규정하는 거죠. 인간은 엄마로부터 모든 걸 고스란히 받아요. 스스로 먹이 활동을 시작하는 나이가 일곱 살이라고 해요. 그때까지 아이는 모방 본능을 통해 엄마로부터 배우는 거예요. 사람들 입맛이 다른 건 엄마의 입맛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성인이 되고 나선 일곱 살까지 쌓인 데이터를 통해 자신의 입맛을 통제하는 거군요.맛있는 음식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엄마가 '이거 맛있는 거야' 하며 줬던 어릴 적 기억으로 머릿속에서 쾌락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음식의 쾌락이란 게 음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음식을 싸고 있는 모방 본능으로 배웠던, 우리 몸에 각인된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현대 사회에 적용하기엔 쾌락의 종류가 너무 많아졌는데요?(웃음)농업 혁명 이후에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서, 도시를 만들면서 규모가 커졌어요. 부족 단위 외의 사람들도 늘어나고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혹은 부족이 함께 먹던 음식 말고 다른 음식도 보게 되죠. 사회가 발달하고 능력이 극대화하면서 인간도 달라지기 시작하죠. 쾌락의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가요. 쾌락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과정에서 음식만으로 절대 쾌락을 완성시키지 않는다는 거죠. 음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 요즘 유러피언 햄버거 많이 유행하네! 그거 먹으러 가야지, 해요.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 뭐예요? '누구랑 갈까?' 요즘 젊은 남녀들이 가잖아요. 분위기 좋아, 여기 유럽인 거 같아, 주방에 멋진 남자가 패티 굽고 있어, 이런 분위기지, 정작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은 중요하지 않아요. 함께 먹으러 간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서 '음~ 맛있어' 말 한마디만 해도 쾌락을 느껴요. 왜? 엄마가 하는 소리랑 비슷하거든. 같은 음식도 상황에 따라 맛없어질 수 있고,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음식의 원재료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도 집중하시잖아요.산업화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어요. 거의 자급자족하는 형태였으니까. 산업 사회에서는 그러지 못해요. 재배하는 사람, 유통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도 따로 존재하고, 먹는 사람도 따로 있죠. 복잡해졌어요. 그것에 대해 하나하나 관찰하고 설명해야 하는 일이 필요한 거죠. 그게 제 역할, 일인 거고.

요즘 확실히 체감하시겠어요.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현저하게 달라졌다는 걸요.얼마나 먹고살 만한가에 따라 달라지죠. 1970년대가 돼서야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1980년대 중·후반 고기 뷔페가 유행했어요.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거든요. 그동안 못 먹었던 것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거지. 1990년대 들어오면서 조금 나은 먹거리에 관심이 생겼죠. 식품영양학적인 지식이 부각되고. 이걸 먹으면 정력이 좋아지네, 피부 미용에 좋네, 그런 게 번져 나갔죠. 그다음 이어진 게 웰빙, 로하스 같은 더욱 더 건강한 음식이었어요. 이후 형성 담론이 이거죠. '그럼, 진짜 맛있는 음식이란 건 무엇이지?' '대체 내가 왜 이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거지?' 자신의 감각을 되돌아보는 시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맛있다고 하는 음식을 무조건 쫓아가는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맛있다고 하는 내 감각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수요미식회>가 그 변화의 시점에 등장했고요.프로그램에서 이게 맛있다, 맛없다 이야기하죠. 패널들의 의견이 충돌해요. 보는 사람은 머릿속으로 '저 음식이 내 감각에는 맛이 있을까' 생각하죠. 그게 지금까지 방송된 음식 관련 프로그램들과의 큰 차이점이고, 음식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라고 생각해요. '과연 내 감각에는 어떨까?'라는 생각의 발화점이 만들어지는 거죠.

자신만의 감각을 찾는 게 핵심인 건가요?누군가가 맛있다고 하면 똑같이 느끼는 게 모방 본능이란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것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그러면 효과는 더 크죠. 엄마가 맛있다고 하면 아기는 무조건 맛있는 거예요. 크면 좀 달라지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포인트가 돼요. 연예인들이 광고를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TV에 나와서 '맛있어요~' 하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맛있어, 맛있어' 하면서 먹으니 맛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진짜 맛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입맛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 입맛을 근거로 왜 맛있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은 없는 거죠. '먹방'이 되는 거예요. 도대체 왜 맛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감각으로 설명해줘야 하는데 못하는 거지. 왜? 훈련을 못 받았으니까. 그 감성만 딱 떨어뜨려 보여주는 거죠.

<수요미식회>가 그 훈련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구체적이고 본격적으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면의 굵기가 어떠니, 가닥이 어쩌니, 이러이러해서 짜더라, 맵더라 등등. 이게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신의 감각으로 저걸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수요미식회> 이후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맛있다, 맛없다' 정도의 멘트를 날리는 방송이면 '쟤네 왜 저래?' 하고 신뢰하지 않는 반응이 돌아올 거예요. 사람들이 자신의 감각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거죠.

번화가에 '<테이스티로드> <식신원정대>에 나온 집'이라고 쓰인 식당이 너무 많아졌어요. <수요미식회> 방영 이후 <아레나> 사무실 앞 돈가스집에 사람들이 줄을 섰더라고요.(웃음)<수요미식회>에서 그 집의 맛을 결정하진 않아요. 소개하는 식당의 선정 이유가 있죠. 기준에 맞춰 선정하는 이유가 뭐냐면, 음식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거든요. 패널들이 맛없다고 하는 식당도 많아요. 그래도 그 집 앞에는 줄을 서요. 아직까진 애매한 거죠. 맛집 방송과 <수요미식회>의 변별력이 정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수요미식회> 두부편이 방영되니 다른 매체에서 '<수요미식회>에 소개된 4대 두부 맛집' 이런 식으로 가져다 써요. 부풀려서요. 문제가 있어요. 그런 건 녹화 때마다 제작진에 수시로 말해요. '우리는 맛집을 선정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취지와 의도로 시작하더라도 사람들이 다르게 보기 시작하면 <수요미식회>도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어요.부작용이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작진도 많이 고민해요.

이 또한 인간의 본능이겠죠.그렇죠. 인증받으려고 하는 거죠. '나도 거기 가봤다.' 그 음식을 먹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사진 한 장 찍는 게 중요하지.

한국 식문화에서 '음식 평론가'는 여전히 낯설어요. 선생님 역할을 '미슐랭 가이드'와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고.유럽에서 미식을 평론하는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분명 있죠. 나처럼 음식과 그 음식을 둘러싼 의미, 문화적인 의미,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 레스토랑 비평가는 달라요. 레스토랑 비평은 따로 존재해요. 사람들 대부분 '미슐랭'이 음식 평가한다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아요. 마지막엔 주방까지 봐야 해요. 식재료 보관 점검도 하고.

레스토랑 비평도 생각해보셨나요?훌륭한 식재료를 가지고 적절한 음식을 만들었는가를 판단하려면 그 음식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춰야 해요. 그래서 저는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어요. 서양 음식은 되도록 토를 달지 않아요.

선생님 주식이 아니기 때문이겠죠?커피 보세요. 내가 에티오피아 산지에 가서 커피나무 보고 원두 나오는 과정을 직접 접해보지 않고, 어떻게 커피에 대해 얘길 하겠어요. 와인도 똑같아요. 내가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 농장에 가서 일일이 다 맛보고 그 맛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어느 와인이 어떻더라 이야기할 수 있겠죠. 포도 본래의 신맛인지, 상태가 안 좋아 생긴 신맛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미각을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기는 힘들어요. 레스토랑 비평에 관심은 있지만 자칫 쉽게 접근하다 헛디딜 수 있어요. 어떤 음식점에 별표를 새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경험주의자' 선생님이 영화 비평하셨어도 비슷했겠죠?그렇죠. 인도 영화 보면 희한하잖아요. 러시아 영화 봐요. 내가 그 감각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그걸 알려면 얼마만큼 파고, 또 파고들어야겠어요. 모든 바탕을 다 알고 하나하나 평가하는 일이 그래서 쉽지 않은 거예요.

비평가로서 선생님의 자세는 깊이 새겨야 할 것 같아요.원래 미각이 뛰어난 사람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아요. 타고난 미각은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의 미각은 훈련하면서 조금씩 민감해질 수 있어요. 물론 아직까지 더 발견하고 해야 할 것이 많죠. 하지만 한국에서 나오는 식재료, 한국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해요.

한국 사회의 큰 화두가 '食(식)'인 만큼 선생님 나름의 철학을 나눠주세요.산업 사회가 이룩한 게 각 개인의 윤리나 책임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하다 보니 만들어진 거죠. 엄마가 나를 낳아서 이 세상에 태어난 거고, 내가 한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은, 개개인은 그래요.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파악하고 평생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이 행복을 줄 것인가 모색해야 하죠. 모험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성취감이나 쾌락을 증축시켜 나가는 것이거든요.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 중 어디서 가장 많은 쾌락을 느끼는가. 음식이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해서 자잘한 쾌락이 쌓이는 거죠. 총량으로 따지면 인간이 음식에서 얻는 쾌락이 가장 많아요.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먹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행복한 사회가 되겠죠?그렇다고 봐야죠.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산업 사회 이후에 우리 삶의 양태가 급격하게 변하긴 했지만 엄마는 반드시 제 새끼를 품에서 키워야 해요. 그러지 못하게 사회가 만든 거죠. 여자들이 집 밖에 나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된 거죠. 이 얘기 들으면 사람들이 뭐라 할 수도 있어요. 남자들도 보육해야 한다고. 그런데 인간이란 동물은 남자가 보육하도록 만들지 않았어요. 동물이 진화해온 수천, 수억 년의 역사를 우린 뒤집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한국 사회의 복지 목표를 보면 아이를 떼어내 엄마가 일하는 동안 국가가 보육해주는 것으로 잡고 있어요. 난 이게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본능에 가장 가깝게 복지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죠. 여자가 아이를 적어도 일곱 살까지는 보육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걸 국가 복지의 최고 목표로 잡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음식은 정치와 절대 무관하지 않아요.

photography 하시시박 |editor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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