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단만 200만장.. 딸한테서 전화 올까 016 번호도 안 바꿔

평택/이순흥 기자 2015. 5. 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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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째 실종 딸 찾는 '혜희 아빠' 송길용씨] 착하고 똑똑한 '복덩이'.. 학교 간다고 집 나간후 실종 딸 찾으러 車에서 쪽잠 자며 전국 구석구석 65만km 다녀, 우울증 걸린 아내는 끝내.. 전단·현수막 만드는데 기초수급 60만원 중 40만원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서울 한남대교를 건너 통근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을 한 번쯤은 스치듯 지났을 것이다. 애타게 누군가를 찾는 현수막 내용이 간절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전 어디선가' 이 현수막을 본 듯한 기억에 다시 한 번 쳐다본다고 말한다. 6일 길을 가다 한남대교 북단에 걸린 현수막을 쳐다보던 한 행인은 "10년 넘게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누군진 몰라도 송혜희란 사람을 아직 못 찾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현수막은 16년째 한남대교 북단부터 경부고속도로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양재나들목까지 6장이 걸려 있다. 종로와 명동, 청계천 등 서울 도심 곳곳에도 같은 현수막이 걸렸는데, 항상 깨끗하고 선명한 상태여서 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든다.

16년간 찢어진 현수막을 기우고, 색 바랜 현수막을 감쪽같이 새것으로 바꿔 걸어놓는 사람은 '혜희 아빠' 송길용(62)씨다. 1999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혜희가 실종된 이후 딸을 찾아 세상을 헤매고 있는 송씨를 지난 5일 수소문 끝에 경기도 평택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33㎡(10평) 남짓한 그의 집 한쪽 벽은 혜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이로 '나의 딸 송혜희는 꼭 찾는다'는 글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송씨 집안의 가훈(家訓)이다.

어린이날인 이날 송씨는 '전국 미아·실종가족 찾기 시민의 모임' 행사에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용인 기흥 휴게소에서 딸을 찾는 전단 150장을 돌렸다고 했다. 송씨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쉬지 않으면 500장 정도 돌릴 수 있고, 주말에는 700장까지 돌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눠준 전단만 200만장, 길가에 내건 현수막은 4000여 장이다. 서울·천안·부산·해남·강릉 등 전국 팔도에 현수막이 붙지 않은 곳이 없다. 그와 함께 14년 동안 45만㎞를 달린 1t 트럭은 2년 전 폐차했고, 지금 타는 중고차의 주행거리도 20만㎞에 가깝다.

송씨에게 '둘째 딸 혜희'는 특별했다. 딸의 이름을 지어준 작명소에서는 '복덩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실제 혜희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웠던 가계 형편이 좋아졌다. 식당과 채소 장사, 양화점 등 손대는 일마다 잘 풀렸다. 공부도 잘했던 혜희는 "선생님이 되어서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드리겠다"고 말하던 속 깊은 딸이었다. 다섯 살 터울 언니와 함께 용돈을 모아 아빠의 첫 휴대전화를 사준 것도 혜희였다. 혜희가 전화를 걸어온다면 이 휴대전화로 걸어올 것이다. 송씨가 17년 넘게 '016'으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다. 송씨는 "부모 없이 자란 혜희 엄마와, 열한 살 때부터 홀로 객지 생활을 한 나에게 혜희는 행복 그 자체였다"고 했다.

하지만 1999년 2월 13일 고3 진학을 앞두고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집을 나선 혜희의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 됐다. 그날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 이튿날 새벽까지 동네를 뒤졌지만 소용없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의 초동 수사에서 혜희양이 버스에서 내릴 때 낯선 30대 남성이 따라 내렸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금은 흔한 CCTV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경찰 수사에서 진전이 없자 송씨 부부는 트럭에 버너와 라면만 실은 채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혜희 사진 등을 인쇄한 전단과 현수막을 곳곳에 뿌리고 걸었다. 생업을 포기하고 차에서 쪽잠을 자며 3년을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혜희 엄마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딸의 얼굴이 그려진 전단을 품에 안고 지내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송씨도 목숨을 끊을까 고민했지만 큰딸이 걸렸다. 잃어버린 딸 혜희를 찾는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살기로 마음먹자 혜희가 살아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송씨는 혜희의 소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봐주길 바라며 전단을 뿌리고 비바람에 해지고 햇볕에 바랜 현수막을 새것으로 바꿔 달며 지금까지 버텼다. 그 사이 재산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송씨는 지금도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 60만원 중 40만원을 전단·현수막 만드는 데 쓰고 있다. 지난겨울 트럭에서 호떡을 팔기도 했지만 여유가 없을 땐 해진 현수막을 실로 꿰맨다.

16년 전 40대 중반이던 송씨는 이제 환갑을 넘겼다. 4년 전엔 현수막을 걸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최근엔 뇌경색으로 쓰러져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전다. 송씨는 "이제는 혜희를 마주한다고 해도 솔직히 내 딸인지 못 알아볼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오늘도 전단을 뿌리고 현수막을 단다. 사람들이 전단을 받아 눈앞에서 버릴 땐 캄캄하고 긴 터널을 혼자 헤매는 기분이다. 그래도 어쩌랴, 송씨에게 혜희는 전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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