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르포] 카트만두 벗어나면 "구호물품 나눠달라" 소요사태까지

2015. 5. 4.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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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취재진 '까부레 블란초' 내 '싸삔 울레니' 마을 동행취재

대지진이 네팔을 강타한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났지만 수도 카트만두를 벗어나 조금만 외곽지역으로 들어가면 구호물품을 둘러싸고 소요사태까지 벌어지는 모양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현지 선교 구호단체와 함께 카트만두에서 북동쪽으로 54km 떨어진 '까부레 블란초'(면단위)까지 장시간 구호활동에 동행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오전 7시 현지 선교 구호단체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호단체 본부로부터 '까부레 블란초'에 지원할 구호품을 받기로 했지만 이미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에 구호팀은 카트만두 인근 시장을 이잡듯 뒤졌다.

구호팀과 CBS취재진은 동분서주했지만 네팔정부가 선포한 임시휴일인 탓에 가뜩이나 가뭄에 콩나듯 문을 연 상점들도 쌀과 생수 등 생필품은 동난지 오래였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30㎏짜리 쌀 70포대와 담요 110장, 천막 80개, 생수 30박스, 1㎏짜리 소금 100봉지 등 5톤 분량의 구호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구호단체 관계자와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한시름을 덜고 트럭에 올랐지만 이날 펼쳐질 대장정에 비하면 예고편 수준이었다.

트럭은 카트만두를 벗어나 북동쪽으로 속도를 높였다. 최대 시속 60㎞인 박타푸르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현지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최근 외곽지역에서 구호물자를 두고 종종 소요사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지인인 네팔 군 관계자와 동행할 예정입니다."

덜컥 겁이 나면서도 설마했다. 지난달 28일 카트만두에 도착해 취재활동을 하면서 네팔인들이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큰 걱정은 접어뒀다.

포장된 도로를 2시간여 달린 끝에 한 군부대에 도착했다. 자신을 '소령'이라고 소개한 군 관계자가 차량에 탑승할 때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어 든든했다.

트럭은 목적지인 '사삔 울레니' 마을로 가기 위해 본격적인 비포장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40도에 육박하는 비탈길을 오르자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앞선 차량 때문에 시야확보가 어려웠다.

미리 준비한 방진마스크를 썼지만 콧속은 금새 흙냄새로 진동했고, 입안은 모래를 한 웅큼 털어넣은 듯 까슬까슬했다.

가는 길목마다 강진에 따른 산사태로 길이 끊겼고, 이를 우회해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차량의 시동은 수시로 꺼졌다. 그럴 때마다 구호팀과 취재진은 차량에서 내려 비탈길을 걸어 올랐고 온몸은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됐다.

굽이치는 비포장 산길은 우리나라 시골길을 오르는 것과 사뭇 달랐다. 말이 도로일 뿐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너비의 산길이 강진에 뒤틀리고 매일 내린 비로 대부분 씻겨져 나갔다.

산길 오른편은 조금만 삐끗해도 수직으로 깍아진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이마저도 도로가 한쪽으로 치우쳐 몸이 45도 기울 정도였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무서웠다.

주요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네팔인들은 땅 값이 싼 산악지역에서 마을을 이루며 평생을 산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길이 위태로워질수록 식은땀이 절로 났다. 운전을 하는 현지인에게 "내려서 걸어갈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네팔어는 전혀 할줄 몰랐다.

정오가 지나서야 평평한 도로가 눈앞에 나타났고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내 처참하게 무너진 전통 가옥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 "구호 물품을 나눠주지 않으면 절대 못 지나갑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지진으로 14명이 숨진 '뻐다' 마을 사람들 수십명이 구호물품을 실은 트럭을 막아섰다. CBS취재진이 탄 차량에 매달리고 일부는 창문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앞서 도착한 국제적십자 차량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옴짝달짝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뻐다 마을 사람들은 "민간구호 단체가 구호물품을 윗마을에만 전달했다"며 "윗마을에서 서 우리들에게 구호물품을 비싸게 되팔고 있으니 직접 물품을 달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급기야 총으로 무장한 현지 경찰까지 출동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항의하는 목소리는 높아졌고 자칫 물리적 충돌까지 우려됐다. 몇십분을 실랑이 한 끝에 취재진과 동행한 군 관계자가 나섰다. 그는 "공식 업무 때문에 방문한 것이니 길을 비켜야 한다"고 설득한 뒤에야 간신히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 등 주요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산간마을에 구호품 지급이 늦어지면서 당장 가족을 먹여야 하는 현지 마을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뻐다 마을을 빠져나온 것도 잠시, 목적지로 향하는 산허리마다 위치한 마을 청년들은 구호물품 차량을 계속 제지했다. 군 관계자도 상황을 반복해 설명하는라 끝내 목이 쉬었다.

실제로 산등성이 마을 상황은 심각했다. 마을마다 적게는 수명에서 수십명까지 사망자가 발생하고 가옥이 모두 파괴됐지만 교통 상황이 열악해 구호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햇다.

한 산등성이 마을의 랑크리시나(81)씨는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쌀은 물론 염소까지 모두 매몰됐다"며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망연자실해 했다.

카트만두에서 출발한지 10여시간이 지난 후에야 목적지인 '사삔 울레니' 마을에 겨우 도착했다. 해발 1700m에 위치한 산 최정상 마을인 이곳은 지난 25일 강진 당시 마을 전체가 함께 밭에서 일을 했기에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가옥이 완파돼 공동 임시천막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메루남 허리바니아(33)씨는 "마을에 외국인은 물론 구호물자가 온 것은 처음"이라며 "마을 대부분이 자급자족하고 있어 앞으로 무너진 집을 어떻게 복구할지 막막하다"고 울상졌다.

구호품을 나눠주자 산간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네팔 정부의 구호손길이 미치지 못한 까닭인지 구호단체를 향해 계속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하산을 서둘렀다. 자동차 라이트에만 의지해 험한 산길을 되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차량에 오르자 한 마을 주민이 달려와 묵직한 자루 하나를 건넸다. 감자였다. 극구 사양했지만 꼭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따뜻한 온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카트만두(네팔) = CBS노컷뉴스 장성주 박지환 특파원 joo501@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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