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가 잘못한게 아닙니다

2015. 4. 3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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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후속편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를 통틀어 전례 없는 돌풍을 일으킨 이 작품이 한국에선 인기가 없었나 보다.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평점 1점을 줘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책과 영화 모두 세계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한국에선 책도 영화도 흥행을 못했다고 몇몇 기자들이 썼다. 1억 부 이상 팔린 책이 한국에선 전자책을 포함해 겨우 55만 부밖에 안 팔렸다나. 우리 출판 시장에서 55만 부는 굉장한 거 아닌가? 영화 관객도 '겨우' 36만 명이라고 말한다. 묻고 싶다. 한국에서 '19금' 로맨스 영화가 관객 수 30만 명을 쉽게 넘겼나? 대상이 다른 것과 비교를 하고 있으니. 내 맘대로 드는 생각에, 이 영화에 억하심정을 품은 여론이나 언론이 있다. 애써 과소평가한다.

왜? 변태 취향의 영화가 흥행하면 애들 정서에 안 좋을까봐? 집에서 살림 잘하는 혹은 직장 생활 잘하는 여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봐? 해외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책보다는 낫다'이다. 어차피 책도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 때우고, 욕구 충족시키는 용도지. 그리고 해외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정 부분 인정한다. 변태성욕자가 어린 여자 유혹해서 엉뚱한 짓 하는 게 백미인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영화에서 주인공 크리스찬 그레이와 아나스타샤 스틸이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나름의 감정선이 있다. 사랑하니까. 그레이가 원하는 사랑과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사랑이 다르지만. 원작의 감정선을 영화가 제대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매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한계가 있다. 책을 읽을 땐 글이 이끄는 흐름에 따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보여주는 장르다.

감정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감정을 구현하는 데는 문자가 훨씬 유용하다. 극장에서 관객은 지루하면 딴 생각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볼 수도 있다.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아무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섹스 장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외 비평가들은 '감정선'에 대한 부분을 애당초 포기했다. 뭐가 문제인가? 이 영화는 <비포 선 라이즈>가 아니다.

우리의 평가는 유난히 냉혹하다. 비평가와 관객이 모처럼 의견의 합의를 봤나 보다. 특히, 혹평하는 관객들은 평점 1점, 별 하나를 주는 것도 기분 나빠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내용이 허술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기대했을까? 이 영화는 애당초 내용이 단순하다. 돈 많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데, 남자가 변태다. 여자는 이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게 전부다.

모르고 봤나? 그런데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이유는 물론 있다. 동양 정서라는 게 그렇다. 아무리 몸매 좋은 여자가 나타나서 벗고 부딪쳐도 감정의 단계라는 것을 조금은 따라야 한다. 그게 아니면 포르노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보러 극장에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두서없다. 만나서 바로 사랑하고, 몇 번 만나더니 섹스하고, 그다음엔 변태처럼 섹스한다. 눈을 가리고, 팔을 묶고, 막, 막 뭔가 한다. 그게 안 예쁘다는 거다.

그걸 왜 그렇게 찍었냐는 거다. 하지만 그건 물 건너온 영화들의 특징이 아닌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아니, 쟤들은 전쟁터에서 총알 날아오는데 뽀뽀를 하고 지랄이니"라고 혼잣말 한 경험이 있다. 어차피 영화인데,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는데, 우리에겐 극적 개연성의 문제가 된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더 뻔하고 촌스럽다. 수식어가 붙는다. '심지어'라고. 심지어 안 야하다는 것이다. 야하기만 했어도 봐줄 만했을 텐데, 라는 심리가 담겨 있다. 물론 남자들의 의견이다. 뭘 기대한 걸까? 어젯밤 문 잠그고 본 '야동'을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런 생각을 가진 남자라면 이 영화를 왜 보러 왔을까? 여자친구 손에 이끌려서(참고로 관객의 성비는 3대7 정도다. 여자가 7이다)?

그런 남자들에게는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여자를 위해 만들어졌다. 여자들은 야한 장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라고 홍보했다. 틀렸다.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는 없다. 여자들은 포르노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들이 볼 만한 포르노가 없어서 여자들이 그동안 포르노를 안 본 게 아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포르노가 따로 있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포르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포르노는 포르노다. 간혹 여자친구나 부인이, 나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다. 실제 보여주면 싫어한다. 더럽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여자들이 원하는 건 상상이지 실재가 아니다. 여자들은 상상하면서 에로티시즘을 느낀다. 남자들은 섹스하는 걸 눈으로 보거나 혹은 몸으로 직접 섹스하는 걸 좋아한다. 물론 여자도 섹스하는 걸 좋아는 하겠지만. 성별에 따라 감각을 누리는 방식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여자들을 위한 포르노'라니? 여자들은 보러 오지 말라는 뜻인가? 원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한국 여자들의 호기심을 당긴 이유는 물론 성행위 때문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섹스를 묘사한 소설이 의외로 없었고, 그걸 백만장자와의 사랑 이야기로 로맨틱하게 바꾼 소설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변태적인 섹스가 묘사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그 소설을 좋아한 게 아니다. 변태든 뭐든, 여자들이 원하는 건 아름다운 상상이다. 어쩌면 그래서 영화의 경우 문제가 된다. 직접 눈으로 봤더니, 상상으로 했던 섹스보다 못하더라는 것이다.

원작에선 그레이와 아나스타샤가 연인으로서 충분히 감정을 주고받고, 신뢰를 구축하는데(물론 이것 역시 여자들의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레이가 아나스타샤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기는 게 불쾌하고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랬나? 그레이가 정말 그랬나? 그레이가 잘못했나? 아니다. 영화와 책이라는 매체의 차이를 차치하고라도, 이건 환상과 상상의 문제다. 결국 감정보다 몸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감정은 상상이지만, 몸은 실재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서양 친구들보다 감정의 우월함에 이끌리거나, 이끌려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아무래도 몸은 그다음이다. 프로이트라면 육체를 해방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하려나? 뭐, 걔들은 걔들이고, 우리는 우리다. 이처럼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보니 이 영화는 실재보다 더 처참한 흥행을 기록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욕을 했든 안 했든, 한국에서도 읽을 사람은 읽었고, 볼 사람은 봤다. 그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쓸데없이 도덕적인 '꼰대'들이 꽤 있다는 것도 분명하고. 그레이는 죄 없다.

Editor 이우성 | Illustration 이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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