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자 농구의 '전설의 슈터', 신동파vs이충희

2015. 4. 2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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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편집부] 한국 농구의 오랜 역사를 통해 숱한 스타들이 쏟아졌지만 '신(神)'이라 불리는 사나이는 많지 않다. 강산이 한번 변할 10년 정도의 세월을 두고 코트를 주름잡았던 신동파(71)와 이충희(56). 이 둘은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듣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동파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이충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를 관류하며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명성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농구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로 모두 성공가도를 달린 김영기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는 "전설의 슈터라고 할 만한 선수는 신동파와 이충희 두 명뿐"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농구의 오랜 역사를 통해 숱한 스타들이 쏟아졌지만 '신(神)'이라 불리는 사나이는 많지 않다. 강산이 한번 변할 10년 정도의 세월을 두고 코트를 주름잡았던 신동파(71)와 이충희(56). 이 둘은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듣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동파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이충희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를 관류하며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의 명성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농구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로 모두 성공가도를 달린 김영기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는 "전설의 슈터라고 할 만한 선수는 신동파와 이충희 두 명뿐"이라고 평가했다.

농구 선수 사진이 종합 일간지 1면에 실리는 일이 있었을까. 1969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이례적인 지면이 눈에 띄었다. 당시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아선수권(ABC)에 출전한 신동파의 슈팅하는 모습이 실렸다. 신동파는 필리핀과의 결승에서 50점을 퍼부으며 한국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자택에서 만난 신동파는 "3점슛과 팀 파울 같은 룰이 없던 시절이었다. 요즘 같았으면 70점 가까이 기록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신동파는 원래 야구 선수를 하려다 휘문중 1학년 때 우연히 농구공을 잡았다. 학창 시절 마른 체구에 '갈비' '황새다리'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가 '득점 머신'이 된 데는 땀 말고는 없었다. "휘문에는 실내코트가 없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손이 얼어터질 것 같아도 운동을 했다" 체력을 기르려고 운동장 200바퀴 달리기를 기본으로 했고 하루에 500~1000개의 슈팅을 쏘기도 했다.

신동파는 "내가 선수 때 훈련을 하면 자유투와 점프슛을 100개 던져 모두 넣으려고 집중했다. 점프슛을 87개 연속 성공시킨 적도 있다. 요즘은 어깨가 좋지 않아 팔도 잘 못 든다. 의사가 선수 때 너무 많이 써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했다. 신동파가 고교 시절까지 사용했던 육군체육관(현 장충체육관)에는 지붕이 없었다. 신동파는 "경기장에 뚜껑이 없어 한 여름에 경기를 하면 코트 바닥이 너무 뜨겁게 달궈져 제대로 뛸 수도 없었다. 작전타임을 부르면 양동이에 신발 밑창을 적신 뒤 다시 뛰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말 그대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는 스토리는 이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가 됐지만 반복 훈련을 통해 터득한 그의 원핸드 점프슛은 교과서로 불리기까지 했다. 신동파는 "잠을 자다 꿈속에서도 원핸드 점프슛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했다.

휘문고 졸업반이던 1962년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된 신동파는 이듬해 연세대에 입학한 뒤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태극마크를 달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69년 한국을 첫 아시아선수권 정상에 올려놓으며 황금기를 맞았다. 필리핀과의 결승에서 '베스트5'는 신동파를 비롯해 김영일, 이인표, 김인건, 유희형이었으며 신현수, 곽현채, 박한, 최종규, 이자영, 조승연, 서상철이 멤버였다. 이 경기에서 신동파를 수비하던 필리핀 선수 3명이 5반칙 퇴장을 당했다. 그래도 한번 불붙은 신동파의 손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필리핀의 국가대표였던 오캄포는 "신동파를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듬해 한국 농구는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에서 이스라엘을 꺾고 사상 첫 금메달을 땄다. 이 때 대표팀 감독이 KBL 김영기 총재였다. 금메달 소식을 다룬 1970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를 살펴보자. '한국은 평균 신장 2m를 마크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맞아 승부의 관건이 리바운드에 있다고 보고 이스라엘 선수들을 리바운드 지역 밖으로 밀어내는 박스아웃 작전에 주력해 이스라엘에 오펜스 리바운드를 허용치 않는데 성공했다. 반면 디펜스가 허술한 이스라엘을 신동파 유희형 등의 롱슛과 김인건 곽현채 등의 날카로운 드라이브인으로 공략, 우세한 게임 운영, 끝내 81대67, 14점차로 대승,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신동파는 "원래 4년 전인 1966년 방콕 대회 때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하지만 홈팀 태국과의 준결승에서 태국 선수들이 난투극을 일으켰는데도 오히려 우리가 몰수패를 당해 결승에 못 올라갔다. 태국 경찰까지 한국 선수들을 협박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신동파는 1970년 유고 세계선수권에 출전해 8경기에서 평균 32.6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슈팅 성공률은 무려 80.4%였다. 최근에는 세계선수권 출전조차 힘든 걸 감안하면 월드 클래스의 실력을 입증 받은 셈이다.

지도자로 변신해서도 신동파는 선수 때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에서는 여자 대표팀 코치로 금메달을 이끌었다. 박찬숙을 앞세워 국내 여자 실업팀 태평양의 무적시대를 주도한 뒤 신생 남자 실업팀인 SBS에 몸담았다.

신동파는 후배들에 대한 뼈있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태극마크의 소중함과 자부심을 깊이 간직하면 좋겠다. 요즘 농구를 보면 60점대 득점이 나오거나 오픈 찬스에서도 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프로답게 보이려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관중이 몰리는 거 아니겠는가"

그의 별명은 '신사수(神射手)'였다. 신이 내린 슈터라는 의미다. 1980년대 아시아를 휘저었던 이충희 얘기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동부 감독에서 중도하차한 뒤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외부와 접촉을 끊은 그를 다시 부른 건 세상이었다.

이충희는 새해 들어 TV 농구 해설가로 활동을 재개한 뒤 올스타전 특별 슈팅 이벤트에 참가해 까마득한 후배인 문경은 SK 감독을 압도했다.

강원 철원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란 이충희 역시 처음부터 농구선수로 명성을 얻은 건 아니었다. "난 노력형이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부에 들어갔다. 운동을 통해 내성적인 성격도 고치고 약골 체질을 바꿔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질이 없다고 농구부에서 두 번 쫓겨났다" 그는 중학 3학년 말에 10개월 동안 매일 슈팅 1000개를 성공시킨 뒤에야 그날 훈련을 마쳤다. "점심은 5분 만에 먹고 300∼400개를 쐈다. 새벽, 야간에도 던졌다. 1000개를 넣기 위해 처음엔 2000개 넘게 시도해야 했다. 그것도 가장 까다로운 위치인 오른쪽 코너에서만 연습했다"

혹독한 훈련의 대가는 달콤했다. 송도고 졸업반 때 전국체육대회에서 50점을 넣었던 그는 고려대 입학 후 임정명 등과 49연승을 이끌며 현대 삼성의 스카우트 전쟁에 휘말렸다. 현대 삼성은 이충희에게 대학시절부터 장학금을 지급하며 공을 들였다. 삼성은 이충희의 부친을 제일제당에 취직시키기까지 했다. 당초 이충희는 삼성 입단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동기이자 라이벌이던 임정명이 삼성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하면서 마음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물량 공세를 펼친 현대였다. 고려대 2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에서 현대를 상대로 펄펄 날았던 이충희를 눈여겨 본 정 명예회장은 무조건 데리고 오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충희는 "1981년 현대에 입단할 때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한 채와 스포츠센터, 현금 등을 받았다"고 했다. 스카우트 금액을 묻자 머뭇거리더니 "당시 30평짜리 강남 아파트를 20채 넘게 살 수 있었다. 한 채에 3000만 원 하던 시절"이라고 대답했다.

현대 시절에도 이충희는 차로 1시간 거리인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숙소와 도곡동 훈련장을 자주 뛰어다녔다. 여름철 강릉 경포대로 하계 연수를 갔을 때는 "살이 찐 것 같다"는 당시 방열 감독(현 대한농구협회장)의 질책에 대관령을 구보로 넘기도 했다. 그의 지론은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충희는 시력이 0.2에 불과해 경기 중에도 골대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인데도 본능적인 슈팅 감각을 과시하며 13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이충희는 "눈이 안 좋아 선배들에게 오해도 많이 샀다. 인사성이 없고 건방지다는 이유에서였다. 멀리서는 누군지 잘 분간할 수 없었던 탓이다"고 했다.

이충희는 19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아경기에서는 1970년 신동파가 그랬듯이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환호했다. 결승에서 한국은 최강 중공을 맞아 누구도 예상 못한 85-84의 기적 같은 1점차 승리를 따냈다. 뉴델리 아시아경기에서 한국 선수단이 차지한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31점을 터뜨렸던 이충희는 결승에서 박수교 신동찬 신선우 임정명과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다. 한국은 신장 열세 속에서 공격제한시간 30초를 완전히 소비하는 철저한 지연 공격으로 중공의 장신 벽에 맞섰다. 이충희는 83-82로 쫓긴 경기 막판 드라이브인 슛을 시도하다 파울을 얻은 뒤 자유투 2개를 모두 넣어 우승에 쐐기를 박았다. 수비에서도 이충희는 지역방어, 하프코트 프레스 등을 빈틈없이 소화해 냈다.

몸을 뒤로 눕히며 쏘는 페이드어웨이 슛은 이충희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휘한 자신 만의 슈팅 모션을 연마했다. 그리고 1980년대 겨울 스포츠의 꽃이었던 농구대잔치 초창기, 현대와 삼성 라이벌 구도의 핵심에서 서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현역 시절 여러차례 60점 이상을 터뜨렸던 이충희는 농구대잔치에서 최초로 통산 4000점을 돌파하기도 했다. 대한농구협회에 따르면 이충희는 농구대잔치 시절인 1983년과 1985년 최우수선수(MVP)에 뽑혔으며 득점왕은 12차례나 등극했다.

이충희는 1986년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45점을 넣었는데 전반전에는 한국이 기록한 37점 가운데 36점을 혼자 기록했다. 이충희는 "1986년 스페인 프로리그와 미국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스페인은 계약조건이 좋았지만 NBA 진출의 꿈에 도전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해 서울 아시아경기가 있어서 보내주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 농구 최초의 NBA 진출 선수가 될 뻔한 사건이었다. 해외 진출을 포기하며 출전한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에서 한국 남자 농구는 중공과의 결승에서 후반 한때 11점차까지 앞섰지만 역전패해 2연패에는 실패했다.

선수 시절 이충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경기가 끝나면 몰려든 팬 때문에 체육관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기도 힘들었다. '코트의 조용필'로 불릴 정도였다. "그 당시 어머니가 우편배달부에게 고생한다며 1만 원씩 주곤 했다. 집으로 하루에 1000통 이상의 팬레터가 왔기 때문이다. 유행하던 종이학 선물은 아마 수십만 마리 받았을 것이다"

이충희는 영향을 받은 지도자로 3명을 꼽는다. 송도 시절 자신을 가르친 고 전규삼 감독과 고려대 시절 은사인 박한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그리고 현대에서 인연을 맺은 방열 대한농구협회장이다. 이충희는 "전규삼 감독님은 농구의 기초에 눈을 뜨게 해주셨다. 박한 감독님에게는 강인한 정신력을 배웠다. 방 감독님을 통해 기술과 전술에 눈을 뜨게 됐다"고 고마워했다.

코트를 빛냈던 그도 지도자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LG 창단 감독을 맡아 지도력을 발휘하긴 했어도 2007년 오리온스 감독 취임 후 7개월 만에 경질된 데 이어 6년 만인 2013년 동부 지휘봉을 잡았으나 다시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관중 시위까지 당한 끝에 물러났다. 두 번 모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모교 고려대와 동국대 감독으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충희는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결국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한다"고 했다.

'내 탓'임을 강조했지만 이충희는 감독으로 날개를 제대로 펴기에는 외풍도 심했다. 오리온스와 동부는 코치 구성에서 이충희의 의견을 배제해 인사 문제가 지적된 데다 외국인 선수를 비롯한 주전들의 연이은 부상에 시달렸다. 엘리트 코스만 밟은 이충희가 자신을 향한 팬들의 비난이 인신공격 차원으로 변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동부 감독 내정이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돈 데 대해 이충희는 "말도 안되는 소설이다. 최인선 감독이 추천을 해줘 계획서를 만들어 동부 관계자와 면접을 통해 결정됐다"고 했다.

이충희는 최근 탤런트인 아내 최란 씨와 요실금 팬티의 TV CF 모델로 등장했다. 평소 소문난 원앙부부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 속에 코트를 호령하던 이충희의 이미지를 또렷이 기억하던 팬들은 아쉽다는 반응도 보였다. 이충희는 "예전부터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데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광고에 나섰다. 조만간 2탄을 찍는다"고 귀띔했다.

하늘 아래에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했던가. 신동파와 이충희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신동파와 함께 운동을 했고 고려대 감독 시절 이충희를 가르쳤던 박한 부회장은 "둘 다 슈팅에 대한 감각은 탁월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골 넣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박 부회장은 또 "이충희는 공격 뿐 아니라 수비도 강했다. 앞 선에서 포인트 가드 수비가 가능했다. 발과 순발력이 빠르다. 슈팅 기회를 찾는 움직임이 뛰어나다. 순간적으로 움직여서 상대 수비를 잘 따돌렸다"고 제자를 칭찬했다. 신동파는 신장이 당시로서는 센터에 육박하는 190cm이다. 이충희는 182cm. 신동파가 스몰포워드에 가까웠다면 이충희는 정통 슈팅가드였다. 박 부회장은 "신동파는 슈팅 거리도 엄청나게 멀었다. 동료들이 신동파를 위한 기회도 많이 만들어줬다"고 했다.

신동파는 "슛이 정확하다는 건 나와 이충희가 같다. 다만 이충희는 키가 작은 편이어서 거의 외곽슛 위주였다. 나는 대표팀 12명 가운데 키가 두 번째로 컸다. 외곽슛을 하다 4번에 한번 정도는 포스트에 들어가 수비를 달고 득점을 했다"고 설명했다. 신동파는 "충희는 자유투 득점이 별로 없었던 반면 나는 파울을 많이 얻어 경기당 6~10점은 자유투로 얻었다"고 덧붙였다.

신동파와 이충희가 한 팀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신동파는 "5명 가운데 두 명의 득점머신이 있으니 상대 팀에서는 수비하는데 골치가 무척 아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동파는 "허재나 유재학이 대표팀 감독할 때 쌍포를 써보라고 조언했다. 지난해 인천 아시아경기에서는 문태종과 조성민을 같이 내보내니까 상대 수비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했다.

이충희는 "내가 중학생 때 (신동파가) 은퇴하신 것 같다. 라디오 중계로 그때 활약하던 모습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미들슛이 굉장히 뛰어나셨다"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신동파와 이충희는 농구를 통해 아시아에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신동파는 요즘도 필리핀을 방문하면 국민 영웅 대접을 받는다. 지난해 LG의 필리핀 전지훈련에 동행했을 때도 극진한 환대와 함께 현지 7개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이자스민 의원은 "신동파는 한국에서 말하는 도깨비 같은 존재다. 아직도 유명하다"고 말했다. 이충희 역시 대만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다. 이충희는 1992년 무릎 부상으로 실업팀 현대전자에서 은퇴한 뒤 대만 홍궈팀과 5년 동안 선수 겸 코치로 계약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요즘 한국 농구의 현실을 감안하면 '아 옛날이여'라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흔히 어른들은 "요즘 애들 왜이래"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 올 시즌 프로 농구는 역대 최저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다. 야투 성공률은 40%대 중반을 밑돌면서 저득점 농구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물론 공인구가 교체된 첫 시즌이라 적응에 애를 먹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어디 명품이 붓을 가리랴. 훈련 과정부터 슈팅 하나에도 혼을 담아 집중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본기에 충실한 훈련 보다는 경기 위주로 이기는 데 몰입한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체격과 체형을 예전보다 훨씬 향상됐어도 기술은 예전 같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기술자나 타짜를 찾기 힘든 시대"라고 말했다. 코트의 열기가 식어간다는 우려 속에 신동파와 이충희 같은 한국 농구의 레전드가 더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글 = 김종석 동아일보 기자, 사진 = KBL 제공

[이 기사는 농구 전문 잡지로 2015년 1월 새롭게 창간한 더 바스켓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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