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엄마와 우리 사회, 뭐가 다를까 싶었다"

입력 2015. 4. 27. 18:03 수정 2015. 4. 2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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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잔인한 엄마' 김혜수..그가 말하는 <차이나타운> 의 사실성

[오마이뉴스 이선필 기자]

배우 김혜수

ⓒ CGV아트하우스

그녀는 정확하게 평가받고, 또 표현해내고 싶었다. 물론 한 존재를 정확하게 담아내고 관객에게 온전히 평가받는 일은 모든 배우의 꿈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상에 한없이 근접하고자 하는 배우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한계를 깨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배우와 평범한 배우의 차이가 생기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차이나타운>은 김혜수가 쌓아온 필모그래피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단순히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 이후 원톱다운 원톱을 맡아서가 아니다. <도둑들>(2012)과 <관상>(2013) 이후 급격한 연기 변신을 해서도 아니다. 근 10년 넘게 스스로 부여한 숙제에 대해 묵묵히 답을 내놨다는 점에서다.

김혜수를 지난 24일 서울시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엄마가 된 김혜수...시대의 비극을 읽어냈다

<차이나타운>에서 김혜수가 맡은 역할은 '엄마'다. 특별한 이름도, 배경도 없다. 고아들을 데려다 키워 사채업을 하고, 연고 없는 이들의 장기를 팔아먹으며 말 그대로 괴물처럼 사는 사람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내 수상한 회사 '마가흥업'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권력이었고, 고아들에겐 절대자이자 하나의 세상이었다. 그 속에서 고아들이 서로 투쟁하고, 이로 인해 갈등이 고조되면서 엄마의 세상 역시 위기를 맞는다.

모성이 거세된 엄마 역할을 두고 김혜수는 어느 때보다 긴 시간 고민했다. "엄마 캐릭터가 잔인해서가 아니라 영화 전반에서 다루고자 하는 정서적 충격이 세서" "그 정서를 이해는 하지만 과연 내가 표현해낼 수 있을지 자신 없어서"가 이유였다.

"이야기에서 굉장한 힘이 느껴졌다. 정서적으로 뭔가 탁 막히는 느낌이더라. 여성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설정도 특이했다. 이야기 자체로는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 일이라고 받아들였는데 돌아서면 실제로 어디선가 있을법한 일 같더라. 막상 출연을 결정한 뒤부턴 현실성에 기초를 두고 출발했다. 각 캐릭터가 원초적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나. 그래서 엄마의 성별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괴물로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무슨 성별이 필요할까. 여성성을 배제하려 했는데 그렇다고 남성성을 부각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이 역시 의미가 없었고, 단지 특별한 설명 없이 차이나타운 그 자체인 엄마를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 <차이나타운>의 한 장면

ⓒ CGV아트하우스

그녀의 말대로 현실성이 핵심이었다. 인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긴 했지만, 김혜수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간파했다. 권력의 속성을 몸으로 체화한 인물. 그렇기에 뿌리 없는 고아들을 키우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착취할 수 있었다. 엄마는 김혜수에게 연기 영역을 한층 넓히는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현실을 극단적으로 확장한 세계가 마가흥업이라 생각했다. 쓸모 있는 고아만 살리고, 쓸모없어진 고아를 내팽개치는 엄마나 지금 사회의 엄마가 뭐가 다를까 싶은 거다.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 만들자고 요즘 엄마들이 말도 못하는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곤 하잖나. 비인간적, 비상식적 일들을 우리가 자행하고 있는 거다. 영화에서 엄마가 일영(김고은 분)에게 던진 '증명해봐 니가 쓸모 있다는 증명'이란 대사 역시 암묵적으로 우리가 품고 있는 말이다. 사실 생명체가 쓸모 자체를 증명할 필요가 있나. 쓸모라는 기준 또한 누가 정하는 건가. 이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잔인한 말이다."

화려했던 겉모습에서 망가져왔던 과거..."원점으로 돌려놨다"

13년 전, 그러니까 KBS 사극 <장희빈> 이후 한창 치고 올라가던 시기에 김혜수는 "영화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작품이 없다. 공들인 작품이 몇 번 엎어지기도 해서 속상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상기시키니 "작품은 많이 들어왔다. 다만 배우로서 욕망을 자극하는 게 없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CF 스타로 데뷔해 섹시 이미지로 부각되던 당시 소속사 사무실로, 심지어 김혜수가 사는 아파트 경비실로도 시나리오가 쌓이곤 했다. 이미지를 소모하는 작품뿐이었고, 되레 이때가 가장 감정적으로 힘든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게 여기까지구나 생각했다. 내 위치가 어디인지 가늠하게 되니 힘들더라. 자, 이제 그만!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배우로서 자의식이 없을 때부터 일을 시작해 대중이 인지하는 김혜수가 됐는데 그걸 깨야 했다. 요즘 친구들은 본인이 뭘 원하는지 확고하고 능동적인데 난 그러지 못했다. 연예계, 영화계에 관심이 있어 시작한 게 아니라 길 가다 우연히 광고(한 초콜릿 회사의 광고 모델로 데뷔, 채시라를 모델로 내세운 회사의 경쟁사였다-기자 주)에 출연한 거잖나. 연예인을 20대 중반까지 하고 있을 줄 전혀 예상 못 했다.

처음은 내 선택이 아니었지만 갑자기 선택의 순간이 온 거지. 대외적으로 김혜수는 핑크빛이었지만 대내적으로는 엉망이었다. 그걸 다시 되돌려 놓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 연기인데 이게 동시에 가장 큰 힘을 주더라. 작품 선택과 촬영 직전까지 참 심란하고 힘들고 진상을 떨기도 하는데 해내면 행복하다. 우리는 늘 증명해야만 한다. 최선을 다하고 확신에 차서 하지만 최선이 늘 정답은 아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 지나고 보니 또 다른 최선이 있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순간의 베스트를 하는 거다. 이것도 참 어려운 거 같다."

왜 연기하느냐 묻는다고?..."그 답을 찾기 위함이다"

ⓒ CGV아트하우스

역설적으로 김혜수는 지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수많은 작품을 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꾸준히 물어왔다. 최근작인 KBS 드라마 <직장의 신>과 <차이나타운>을 보자. 마치 김혜수가 여배우의 대표주자로서 길을 개척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다. 그간 "여배우들이 출연할 다양한 작품이 없어서 아쉽다"고 말한 것과도 이어진다. 김혜수는 주저 없이 "역할의 비중이나 긍정성, 부정성보다는 얼마나 주체적인지가 중요하다"고 답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기능적인 캐릭터에 유독 여배우가 많이 소모된다는 뜻일 것이다.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든 연기할 땐 내 일을 해내면 된다. 어쨌든 작품마다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된다. 진정성을 담았다고 했는데 막상 모니터로 보면 사라진 경우도 있고, 망친 거 같은데 진정성이 담길 때도 있더라. 감히 말하지만 어릴 땐 인생을 더 살아내고 깊이를 갖추면 연기가 나아지고 풍성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크더라. <차이나타운> 역시 그랬다. 엄마를 이해하고 아는 것과 표현하는 건 달랐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게 배우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 대답에서 김혜수가 품고 있던 숙제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왜 연기를 하는가'이다. 그렇게 아파했으면서도 왜 김혜수는 대중 앞에 서왔을까. 잠시 침묵. 깊어진 눈으로 그녀가 답했다.

"나름 청소년기도 잘 보냈고 좋은 영향도 받았지만 내가 배우로 자격이 있나 꽤 깊이 생각해 왔다. 내가 여기까지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근데 아직까지 하고 있다. 먼 훗날을 생각해봤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감성이 자극받는 이때 연예인이었지, 사람들이 배우라고 말했어'라는 사실만으로는 안 되겠더라. 남이 부여하는 의미와 상관없이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다. 의미를 찾으려다 끝날 수도 있으니 진작 관둘 걸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찾으려 한다. 내 몸과 정신이 가장 활발할 시간에."

어쩌면 김혜수가 걸어온 길은 '배신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대중과 관계자들이 품었던 기대에 대한 배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아주 훌륭하게 배신해냈다. <차이나타운>이 그 배신을 위한 큰 보폭의 걸음이 될 거라 생각한다.

ⓒ CGV아트하우스

○ 편집ㅣ이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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