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매니 파퀴아오, '빈민가 소년에서 국민 영웅까지'

강청완 기자 입력 2015. 4. 27. 11:33 수정 2015. 4. 2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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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파퀴아오 역전 스토리

'빈민가 소년에서 국민 영웅까지'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일대기를 설명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문장이 있을까요? 마치 영화의 헤드카피 같은 이 문장처럼, 파퀴아오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길거리를 전전했고, 무작정 상경한 뒤 링 위에 올라 두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스타로 꼽히는 그는, 과장 조금 보태서 조국 필리핀에서는 신(神)과 거의 동급 대접을 받습니다. 파퀴아오를 잘 모르거나 복싱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전 세계를 뛰어넘어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동과 매력이 있습니다.

맨발로 빈민가를 헤매던 어린 시절

파퀴아오는 1978년 12월 17일,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제너럴 산토스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가끔 TV로 접하는 동남아 시골 마을의 헐벗은 어린 아이가 바로 파퀴아오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파퀴아오는 코코넛 나무로 지붕과 벽을 만든 야자나무 오두막집에서 홀어머니와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빈곤과 싸운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이른 새벽마다 어머니의 묵주 기도를 들으면서 "우리가 자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하는 물음을 날마다 마음에 품었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합니다.

5살 때부터 바닷가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어부들의 일을 돕고 물고기를 나눠 받았습니다. 12살에는 아예 소년 가장이 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을 중퇴하고, 길거리에서 도너츠와 담배 등을 팔았다고 합니다. 복싱을 처음 접한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얹혀살던 삼촌에게 처음 복싱을 배웠고, 동네 공원에서 스파링도 벌였습니다.

파퀴아오는 복싱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금방 두각을 드러냈고 나름 대전료도 받았습니다. 첫 대전료는 단돈 2달러였습니다. '2달러'를 대전료로 받던 소년이 훗날 한 번의 경기로 얼마를 받게 될 지는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13살이 되던 해, 파퀴아오는 사흘 동안 밀항선을 타고 수도인 마닐라로 상경합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파퀴아오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마닐라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을 안 해주셨을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해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부모님 전상서를 남기고 서울로 향하는 이 레퍼토리는 우리에게도 딱히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아니, 가난을 겪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13살 소년이던 파퀴아오에게 복싱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두 주먹에, 그야말로 모든 걸 걸었던 거죠. 그렇게 기적같은 커리어가 시작됐습니다.

● 두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다

링에서 먹고 자며 복싱을 연마한 파퀴아오는 1995년, 18살의 나이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사실은 18살이 아니라 16살이었습니다. 18살 전에는 프로에 데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를 속인 겁니다. 몸무게도 기준 체중에 모자랐기 때문에 주머니에 무거운 잡동사니를 잔뜩 넣은 채 저울 위에 올랐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합니다.

이후에는 연승 가도를 달렸습니다. 데뷔 첫 해에는 10번 싸워 10번 모두 이겼습니다. 단 한 차례 부상으로 인한 패배를 제외하고는 데뷔 2년만인 1997년 동양타이틀을 획득했고 3년째인 이듬해 드디어 첫 세계타이틀(WBC 플라이급)을 따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퀴아오의 연승 상대에 우리나라 선수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96년과 97년, 2000년에 각각 우리나라의 이욱기, 이성열, 채승곤 선수와 맞붙었는데 모두 KO 또는 TKO승을 거뒀습니다)

체급을 올려 슈퍼밴텀급에서도 세계챔피언을 차지한 파퀴아오는 5차 방어까지 성공한 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가 될 명트레이너 프레디 로치를 만납니다. 프레디 로치는 한때 잘 나가던 복서였지만 몸을 혹사한 탓에 파킨슨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명트레이너는 천재 선수의 재능을 금방 알아봅니다. 55kg의 자그만 소년을 세계 최고의 복서로 만들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해 6월, 파퀴아오는 역사적인 라스베가스 데뷔전을 치릅니다. 상대는 '남아공의 킬러'라고 불렸던 IBF 슈퍼밴텀급 세계챔피언 레드와바였습니다. 당시 방어전을 치러야 했던 레드와바는 2주 전까지 도전자를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파퀴아오는 이른바 '급조'된 상대였습니다. 당시 중계방송의 오프닝은 인상적입니다. "상대는 매니 파카이...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파퀴아오입니다" 멀리 필리핀에서 온 조그만 복서의 이름을 캐스터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날, 파퀴아오는 링 위를 지배했습니다. IBF 세계챔피언 레드와바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다시피 했습니다. 여유 만만했던 흑인 복서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고, 보다 못한 주심은 6회 TKO를 선언하고 맙니다. 송곳 같은 펀치를 끊임없이 쏟아 붓는 파퀴아오의 인상적인 경기 스타일에 라스베가스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인지도를 높여가던 파퀴아오는 세계 중경량급 복싱을 호령하던 '멕시코 3인방' (안토니오 바레라, 에릭 모랄레스,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을 잇따라 꺾으며 세계적인 복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기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페더급 최강으로 꼽히던 바레라는 파퀴아오에게 얼마나 두드려 맞았던지, 바레라의 트레이너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를 중단시킬 정도였습니다. 주 무대였던 미국 복싱 팬과 전문가들도 키 169cm의 이 조그만 아시아 출신 복서에게 열광했습니다. 그동안 미국 복싱 선수들이 넘지 못했던 멕시칸의 벽을 파퀴아오가 넘자 대리만족을 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질 때 지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펀치를 쏟아붓는 저돌적인 파이팅은 모두가 빠져들기에 충분했습니다.

● 정상에서 대결…"파퀴아오 보호법을 만들자"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파퀴아오는 2008년 12월, 세계 최고 수준의 거물과 만납니다. 미국 국적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가 그 상대였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호야는 6체급에서 10번의 세계 챔피언을 지냈고, 은퇴 이후에도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야말로 '전설'로 꼽히는 선수입니다. 당시 호야는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대결이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파퀴아오가 '멕시코 3인방'을 줄줄이 꺾자 히스패닉계인 호야가 싸움을 제의했다고도 합니다.

이 대결이 얼마나 주목을 받았는지, 역설적으로 파퀴아오의 조국 필리핀에서는 반대 운동까지 일어났습니다. 파퀴아오는 이미 필리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어 있었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파퀴아오가 호야에게 질까봐, 아니, '맞아 죽을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퀴아오가 플라이급에서 출발한 단신(短身)이었던 반면, 호야는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파퀴아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국가의 자부심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파퀴아오의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될 정도였습니다.

막상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시작되자 우려는 환호와 놀라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사정없이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호야의 얼굴은 라운드를 거듭할 때마다 부풀어 올랐습니다. 8라운드가 끝나자 호야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됐고, 주심은 결국 파퀴아오의 TKO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복싱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겁니다.

● 국회의원, 농구 감독…최고의 스타가 되다

파퀴아오는 그렇게 한동안 전성기를 이어가며 세계적인 복싱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복싱이 침체된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면이 있지만, 파퀴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최상위권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조국 필리핀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파퀴아오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나라 전체가 마비 상태가 될 정도니까요.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도 내전을 멈추고, 범죄율을 제로로 떨어지고, 거리에는 차가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 일부 지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도, 이재민들이 모여 파퀴아오의 경기를 보는 장면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2009년에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격인 필리핀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합니다. 사실 파퀴아오는 이전에도 하원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는데, 상대 후보의 선거 표어가 "파퀴아오를 더러운 정치판에 들이지 말자"였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파퀴아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포스터로 내세우고 어떻게든 인연을 맺으려고 합니다.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퀴아오고, 그 다음은 파퀴아오의 코치인 프레디 로치, 그 다음이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끊임없이 대선 출마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연예계에서도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았습니다. 가수로 앨범을 내고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엄청난 횟수의 광고 출연으로 '파퀴아오 경제 효과'를 따로 추산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014년에는 프로농구팀에 감독으로 참여했고 농구 선수로 실제 경기에 출전하기도 하며 다양한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폭넓은 행보만큼이나 통 큰 선행도 잊지 않았습니다. 지난 2013년에는 태풍 하이옌으로 고통받는 이재민들을 위해 대전료로 받은 191억 원을 전액 기부했고 지금도 파퀴아오 재단을 통한 자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끊었다고 선언했지만 한때 술과 투계(鬪鷄)도박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탈세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퀴아오는 적어도 필리핀 안에서는 단언컨대, 신(神)에 가장 다가선 인물일 겁니다.

● 파퀴아오: 끝없는 도전

외도에 너무 힘을 쏟았기 때문일까요, 파퀴아오는 이후 잠시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지난 2012년 치른 2경기에서 모두 패배를 당하며 주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던 마르케스와의 경기에서는 6회 충격적인 KO 패배를 당했습니다. 턱을 맞고 완전히 드러누운 파퀴아오의 모습에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파퀴아오는 보란 듯이 재기했습니다. 곧바로 이듬해 브랜든 리오스를 상대로 웰터급 챔피언벨트를 되찾았고 이후에도 연승을 거두며 복귀 이후 3연승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지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나이도 불혹을 바라보는 37살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파퀴아오는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대결' 앞에 섰습니다. 21세기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무패 전설' 메이웨더가 그 상대입니다. 5년 동안 말만 무성했던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더 적은 대전료를 받기로 하고 (물론 그 액수도 천문학적이지만) 언더독(Underdog), 즉 도전자의 입장에 섰습니다. 도전자의 입장이 불만족스럽지 않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도전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오히려 더 동기부여가 되고 용기와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파퀴아오의 인생은 '도전' 그 자체로 요약됩니다. 필리핀 빈민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상경해 링 위에 올랐고, 세계무대를 두드려 세계챔피언이 됐습니다. 플라이급부터 끊임없이 체급을 올려 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것은 인간 한계에 도전해 아예 넘어선 것으로 평가됩니다.

딱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필리핀 출신의 이 자그마한 남자에게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굳이 세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감동을 느끼고 이 남자를 응원할 수 있는 건 그가 걸어온 길, 또 그의 이야기가 가진 힘 때문입니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남자의 성공 신화, 그 가장 완벽한 현실 버전'에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대입해 보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겁니다. 대결의 승패를 떠나, 파퀴아오의 '끝없는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그 어떤 영화보다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머지않았습니다.

▶ [취재파일] 메이웨더-파퀴아오, 자신의 스타일 지켜야 승리

▶ [취재파일] 메이웨더-파퀴아오 미리 알아야 할 10가지

강청완 기자 blu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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